한국 대중문화가 다양성을 획득한 시점은 1980년대다. 다른 시대라고 실험과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떤 시대는 가위질에 신음했고 어느 시대는 자본에 절망했다. 문화 생산자의 입장이기도 하고 선택에 제한을 받았다는 점에서 소비자도 마찬가지다. 80년대가 시작되면서 당시 정부는 공연법 개정을 통해 소극장 설치를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꿨다. '영화의 대중화와 새로운 연극의 창조를 위한 실험정신'을 모토로 내건 소극장 활성화 법안은 문화계의 환영을 받았고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태동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지역에서도 쇼핑센터를 중심으로 소극장이 개관했고, 호텔처럼 공간의 여유가 있는 곳은 스스로 공연 유치에 나섰다. 하지만 적극적 문화 소비라고는 영화 보기가 전부였던 대다수 대중에게 소극장은 동네마다 생긴 재개봉관이었다. 대개 돈벌이가 적당히 끝난 영화 한 편과 성인등급 영화가 동시 개봉되었는데 소심한 일탈 공간으로 충분했다. 일주일에 두 번은 들렀던 것 같은데,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양철북'이었다.
'세일즈맨의 죽음' '존 말코비치의 25시' 등을 만든 폴커 슐렌도르프(Volker Schlondorff) 감독이 만든 양철북은 귄터 그라스의 원작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놀랍도록 원작의 의도를 구현해 낸 영화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속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포스터에 적힌 홍보문구는 적당히 성적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사진도 '그로잉 업'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영화는 난해하기 그지없었고 기괴하기까지 했다. 영화보기를 포기하고, 차라리 극장 로비로 나와 프로야구 중계를 보는 관객도 제법 있었을 정도니 그야말로 저주받은 관람이었다.
지난 13일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가 타계했다. 20세기 독일 문학의 가장 위대한 작가 그라스는 끝없는 반성과 과거 청산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1927년 폴란드 단치히에서 태어난 그라스는 독일계 아버지와 슬라브계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에 징집된 바 있는 그라스는 끊임없는 죄의식에 시달렸고 이는 예술을 통해 구현되었다.
조각을 공부하고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했으며, 재즈 음악가로도 활동했던 그라스는 비판적 문인 집단인 '47그룹'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문학가로서 행보를 보인다. 47그룹은 한국 문학계에도 영향을 끼친 바 있는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 저항적 작가 집단이 47그룹의 정신을 수용했다.
양철북은 47그룹 당시 구상된 작품이다. 난쟁이 오스카가 나치 치하의 독일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작품은 독일 표현주의와 그로데스크로 독일 자본가 계급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했고 1999년 그라스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양철북 때문이었다. 영화도 극찬을 받으며 197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라스는 문학과 예술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방법을 고민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반성과 자기고백, 과거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라스를 떠나보내며 한국 사회의 모습을 겹쳐 본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 주둔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자들이 방문했을 때 우리가 보인 태도, 문학가의 상상력이 따라갈 수 없는 정치권의 행태, 그리고 1주기를 맞은 4'16 세월호 참사. 과연 반성과 자기고백이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양철북에서 분노와 공포에 둘러싸인 오스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비명 지르기다. 하지만 비명은 우아하고 고상하게 놓인 와인잔을 깨 버릴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권오성/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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