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로 출근하기로 마음먹었는데 하필이면 사흘 정도 추울 거라는 일기예보가 TV에서 흘러나온다. "뭐 입춘도 지났는데 추워봤자지"라는 생각도 잠시, 공동현관문이 열리자 싸한 기운이 확 밀려오는 게 잠깐 갈등하게 된다.
그날도 요맘때인 것으로 기억한다. 요란스러운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우린 소방차에서 익숙한 몸놀림으로 공기호흡기 등 개인 안전 장구를 챙기며 아파트 화재현장으로 출동하고 있었다.
"김 반장, 저기 시커먼 연기 봐봐…."
"현장에 도착하면 옥내소화전을 사용할 테니 수신호에 맞춰 김 반장은 밸브를 개방하도록."
각자의 임무를 확인한 후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각자 머릿속으로 현장을 가상으로 그려보며 해야 할 일들을 되짚어본다. 귀에선 소방차량 출동 사이렌 소리가 더 요란하게 울리고, 제법 멀리서도 검은 연기가 눈에 들어온다. 보통 아파트 화재는 음식물 조리 부주의로 인해 음식물이 타는 냄새가 나서 이웃주민이 신고해 출동한 경험은 많았지만, 저 멀리서 보이는 검은 연기는 현장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말해줬다.
출동 중 무전기에선 "계속 아파트 화재 신고가 들어온다"라는 메시지가 전달되니 나도 모르게 손은 안전 장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달리던 소방차량이 멈춰 섰다. 사이렌 소리에도 자기 차로에서 양보하지 않는 차량들 때문이었다. 확성기로 비켜줄 것을 요청하자 그제야 천천히 비켜줬다. 이번엔 아파트 근처에 접어들자 불법 주정차들이 눈에 들어온다. 일반차량은 쉽게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지만 덩치가 큰 소방차량은 느림보가 될 수밖에 없는 공간 속으로 운전대원은 온 신경을 집중하며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핸들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나도 모르게 구시렁구시렁 원망의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한편으로는 아예 진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불법 주정차들로 점령된 길들을 수없이 접해본 우리로서는 이렇게라도 진입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여곡절 끝에 신고접수된 현장 아파트에 도착하였다. 1분 1초가 아까운 시간을 불법 주정차 등으로 허비했다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더 바빠졌다. 공기호흡기를 등에 이고 현장에서 사용할 각종 소방장비를 가지고 10층인 현장까지 계단으로 진입하는데 어느새 숨소리는 거칠어지고 움직임도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방수도 하기 전에 체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화재현장에 도착하니 현장 거주자로 보이는 남자가 우리를 보고 흥분한 상태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행여나 내부에 요구조자가 있는지 물어보니 다행히 없다고 하였다. 일단, 현장 거주자를 안전한 아래층으로 대피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울부짖으며 도무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현장 거주자를 대원 두 명이 잡고 대피시켰다. 약간 열린 현관문 사이로 연기가 연신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각자 면체를 쓰고 공기호흡기를 의지한 채 현관 옆에 설치된 옥내소화전함을 열고 호스를 펼쳤다.
"김 반장, 밸브를 개방해"라는 신호와 동시에 밸브를 돌렸다. 그런데 "김 반장, 밸브를 개방하라니깐!", "물이 안 나와!" 관창을 잡은 선배의 손짓 다그침에도 결국 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군인에겐 총알이 목숨이듯이 소방관이 화재 진압 시 물이 목숨인데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자칫 내부로 진입하려는 선배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무전기에선 "소방펌프실로 가서 확인해!", "소방안전관리자에게 연락해!" 등의 내용이 들렸다. 옥내소화전을 이용하려던 진압 계획은 무용지물이 된 것 같았다.
항상 개방되어 있어야 할 소방 펌프실의 밸브를 관리실에서 겨울에 동파 우려로 닫아 놓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연락을 접하고 다시 개방하도록 하는 사이 로프를 이용하여 10층까지 호스를 끌어올리고 소방차량 펌프를 가압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관창에서 물을 내뿜으며 본격적인 화재진압이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길은 잡을 수 있었지만 최소한의 피해로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옥내소화전만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면 최소한의 피해로 화재를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을 아파트 측에서 동파를 우려해 밸브를 잠가 놓은 게 피해를 더 키웠다.
화마가 휩쓸고 간 흔적 속으로 집주인의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힘없이 들어와 물건 하나라도 찾으려고 새카맣게 그을리고 탄 물건을 주섬주섬 챙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의 화마가 얼마나 무섭고 한 가정의 행복을 순식간에 앗아가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화재의 원인은 이러하였다. 신혼부부가 사는 곳이었는데 남편이 아내에게 기념 이벤트를 준비하기 위해 옆방에 촛불을 켜놓았던 게 화근이 되었다. 아내에게 기쁨을 안겨줄 수도 있었던 촛불 하나가 사소한 부주의로 남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신혼의 단꿈마저 깨버렸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사소하게 생각할 수 있는 촛불 하나의 부주의와 긴급차량에 대한 양보의식 결여, 불법 주정차, 소방시설 관리 허술이 뒤엉켜 화를 더 키운 것이었다.
불은 로마신화에 나오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와 같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사용하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도, 불행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겠다.
김동규(달서소방서 월성안전센터 소방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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