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인 이규보(1168~1241)는 32세 때 무신 최충헌이 베푸는 초청시회에서 그를 국가적인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 그 일로 평론가 김현에 의해 무인정권하의 기능적 지식인의 권력에 대한 아부를 유교적 이념으로 호도하였고, 그것을 유교적 교양으로 교묘히 숨겨, 가장 강력한 정권 밑에서 권력자에게 시를 써 바치고 입신출세한 곡학아세의 전형으로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작품의 양질이나 대가로서의 풍모, 서정적 감수성, 우주의 철리는 당대 최고 시인으로 내세워도 전혀 손색이 없다.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유학자이면서도 일생 동안 노장과 불교에 심취하여 만년에는 시와 거문고, 술을 좋아해 삼혹호 선생(三酷好先生)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의 시 '산석영정중월'(山夕詠井中月)은 일찍이 호곡 남용익에 의해 고려조 5언 절구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지목된 바 있다. 작품 전문을 옮겨 본다.
'산중에 사는 스님 달빛이 너무 좋아/ 물병 속에 함께 길어 담았네/ 방에 들어와 뒤미처 생각하고/ 병을 기울이니 달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네.' (山僧貪月色/ 幷汲一甁中/ 到寺方應覺/ 甁傾月亦空'산승탐월색/ 병급일병중/ 도사방응각/ 병경월역공)
이 시는 샘물에 비친 산중의 달을 통해 물속의 달이 진짜인지, 허공에 떠 있는 달이 진짜인지에 대해 선의 화두를 들고 있다. 색과 공의 문제다. 물병 속에 함께 길어온 달을 방에까지 갖고 들어와 달을 찾는 시인의 선미(禪味)는 그야말로 '무미의 미'라고나 할까? 달은 물속에 들어가도 몸이 젖지 않고, 물 밖에 나와 있어도 물속에 제 몸을 둘 줄 아는 신묘한 사물이라 더욱 그렇다.
문제는 달이 아닌 '물'에 있다. 물의 존재와 사유의 계기가 된 이 시를 접한 이후 나는 '한 방울의 물에도 우주의 그늘이 숨어 있다' '물은 허공에 누워 잔다' '별들은 우주의 물통이다' '물은 하늘의 음악이다' 등등, 생각의 나래를 펼쳐 간다. 공이자 색이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물은 한순간도 동일성을 유지하지 않으면서 인간에서 식물로, 풀에서 나무로, 땅에서 하늘로 이행하는 변화 그 자체다. 더욱이 세계는 눈에 보이는 물보다 보이지 않는 물이 무량하다. 물은 구체를 통해 추상이 되고, 추상을 통해 구체가 된다. 하여, 물은 하나다. 그 하나는 '하나로 비롯되었으나 비롯됨이 없는 하나이고, 하나로 끝나지만 끝남이 없는 하나이다.'(一始無始一 一終無終一'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 천부경) 물은 원하든 원치 않든 타자와 뒤섞여 끊임없이 우주를 생성한다. 강유와 곡직을 겸한 물은 다종다양한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다. 범람하는 역사의 탁류 속에서 때로는 훌륭한 인물로, 때로는 악한 자의 모습으로, 욕망과 지혜의 은유를 빌려, 물은 자신을 나타낸다. 그래서 물은 합치면 오래 가고, 오래 가면 반드시 갈라지고, 가득 차면 흘러넘치고, 모자라면 채워지고, 마침내 물거품이 되는 부재의 현존이다.
김동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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