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준 해양수산부장관은 세월호 인양 문제에 대해 "인양하자는 여론이 높아져 여론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여론이 인양하라니 인양하겠다는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설훈 의원은 여론을 근거로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 아닐 수 있다고 했다. 같은 당 문재인 대표는 국무총리 후보 인준 여부를 여론조사로 결정하자고 했다. 여도 야도, 좌도 우도 모두 뭔가에 단단히 씌어 있다. 여론이 공적 문제에 대한 최종적 판관이라는 망상(妄想)에.
대중 민주주의의 자기말살적 타락이요 우리 사회 집단 지력(知力)의 왜소와 천박의 가차없는 현시(顯示)이다. 이런 사회에서 합리와 이성은 숨을 쉬지 못한다. 그 필연적 귀결은 군중의 함성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대중독재의 출현(히틀러도 무솔리니도 여론의 지지로 권좌에 오르지 않았던가)이거나 여론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해야 할 것을 못하는, 국가 이성의 마비이다. 세월호 진상조사위원회에 유족을 넣느냐 마느냐를 둘러싼 기나긴 소모전에서 이미 경험한 바다.
우리는 보통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어도 항상 현명하게 판단하며, 설사 현명하지 않더라도 선의(善意)에 추동되어 행동한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이런 믿음에서는 보통사람들은 무엇이 올바르고 진실인지 직관적으로 식별해낼 수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소리는 상식적 올바름의 근거가 된다. 이는 사실과 관계없는, 자유주의 철학자 칼 포퍼의 말을 빌리자면 '신화'이다.
여론은 조변석개(朝變夕改)하고 천변만화(千變萬化)한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것이 여론이다. 이 중 어떤 시점의 여론이 보통사람들의 진정한 뜻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이 있기나 한 걸까? 게다가 동일한 집단 내에서도 여론은 하나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 여론은 조작될 수도 있다.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여론은 정반대로 나온다는 것은 이제 상식도 아니다.
여론은 책임지지도 않는다. 익명성 때문이다. 익명의 울타리는 신중한 판단과 책임 있는 행동에서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칼 포퍼가 여론을 '무책임한 형식의 위력'(irresponsible form of power)으로 규정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여론은 합리적인 공론(公論)일 수도, 대중의 무책임한 찰나적 인상비평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여론이 세월호를 인양하라고 하니 인양한다'는 것은 국가 역할의 포기 선언이다. 여론이 세월호 인양의 당위적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과학적 진실도 여론이 결정한다는 헛소리다. 설훈 의원이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 아닐 수 있다"고 한 근거로 제시한 것은 지난 3월 23일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였다. 이 조사에서 천안함 침몰에 대한 정부 조사를 못 믿겠다는 응답은 47.2%, 신뢰한다는 응답은 39.2%였다. 그러면 천안함 폭침은 확실히 북한 소행이 아닌가? 여론조사가 판별 근거라면 절대 그럴 수 없다. 같은 리얼미터의 2013년 조사 결과는 북한 소행이란 응답이 69.2%였다. 설 의원의 논리대로라면 천안함 폭침은 2013년에는 북한 소행이었지만 올해는 아니다. 그리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다시 북한 소행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소가 웃고 개가 하품을 할 일이다.
정부의 조사 결과가 진실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든 아니든 여론이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설 의원의 주장은 무슨 소리를 해도 정부 발표를 안 믿겠다는 아집일 뿐이다. 이런 정신구조에서는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여론은 '나쁜 여론'이 된다. "히틀러도, 유신도 국민이 만든 것"이라며 "국민 정서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국민 여론을 무조건 따를 필요가 없다"는 지난해 노영민 의원의 발언은 이를 잘 보여줬다. 이렇게 여론은 진리의 담지자가 되기도 하고, 대중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여론의 진짜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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