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그때가 처음이었다. 수업 진도에 쫓기시던 윤리선생님이 스쳐 지나가며 말씀하셨던 '논어' 학이(學而)편의 제 1장 첫 구절. '공부가 재미있다고? 그럴 리가? 역시 성인(聖人)은 우리 범인(凡人)과 다르군.' 드라마 속에나 나옴직한 환상적인 대학을 꿈꾸며 하루하루 고행의 시간을 채우고 있다 여겼던 그때, 공자님의 그 말씀은 정말 '공자 왈 맹자 왈'의 공허한 울림이었다.
새내기 대학시절, 국어교사는 국어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다. 허나 세종대왕님의 한글 창제 시점이 꽤나 늦은 관계로 우리 국문학의 상당 부분은 한자로 기록돼 있었다. '국문학 선독' 강의시간에 한자로 고전(苦戰)하던 나머지, 마지못해 '고전 강독 모임'을 찾았다. '논어집주'를 살포시 손에 들었다. 겉표지와 속표지를 넘기니, 다시 첫 구절과 마주쳤다. '學'은 짚으로 새끼를 꼬는 모습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짚어가며 꼼꼼하게 해석해나갔다. 게다가 공자님 말씀뿐만 아니라 주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님들께서도 한 마디씩 거드는 바람에 참 마디게도 넘어갔다. 짧은 한자 실력으로 한문에 집중하다 보니, 결국 공자님 말씀은 멀어져갔다.
교직 발령을 받은 어느 날의 국어수업 시간, 다시 공자님 말씀과 만나게 되었다. 자신을 국보로 칭하셨던 국문학자 양주동의 수필 '면학(勉學)의 서(書)'에도 논어의 첫 구절은 등장한다. 이번에는 배우는 즐거움을 앗아가는 입시 중심, 암기 중심의 교육현실을 통탄하며 읽어갔다. 공자님도 이 시대를 살아가신다면 감히 배우는 것이 즐겁다고 말씀하시지 못하셨으리라. 공자님은 세상 좋을 때 태어나신 거라고.
마흔 넘기기가 생각보다 힘이 든다. 인생의 반환점에 당도하였으나 인생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이때 순전히 책 제목 때문에 다시 '논어'를 꺼내 든다. 마흔에 읽는 논어, 이전과는 조금 다르다. 세월이, 인생의 무게가 책장을 넘기고 있다. 평범하고 담백하게 표현한 말 속에 담긴 삶의 진리가 조금씩 머리가 아닌 마음에 와 닿는다. 일흔이 넘은 아버지의 정식결혼이 아닌 야합(野合)으로 태어났고, 그마저도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창고지기와 가축지기 등을 전전하며 생존을 위해 세상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공자의 딱한 인생이 말을 걸어온다. 명문대작 후손의 여유로운 배움이 아니라 고된 삶 속에 단비같이 느껴졌던 그 배움의 즐거움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배움에 대한 간절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누군가의 해석이 덧씌운 것이 아닌 오롯이 나의 논어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다시 '논어' 원전에 도전하고 있다. 여전히 어렵고, 책장은 쉽사리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구절 속에 담겨 있는 2천500여 년 전 공자의 치열한 삶의 이력이, 군자(君子)를 닮아가려는 깊은 내면의 다짐이, 사무치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내게 말을 건네 온다. 이처럼 '고전(古典)'의 매력은 단순히 옛날부터 전해져오는 '고전(古傳)'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닐까?
지난 4일 토요일 대구여고에는 고전 읽기와 배움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휴일의 달콤함을 반납한 30여명의 인근 학교 고등학생이 모였다. 이들은 장장 4개월에 걸쳐 진행될 인문학 서당에 참석해 '논어'에 대한 주제 특강을 들었다. 벌써 '논어'를 다 읽은 뒤 더 깊이 있게 알고 싶어 온 학생부터 '그나마' 이 프로그램에 참석하면 억지로라도 책을 읽겠지 하는 마음에서 참여한 학생까지 다양한 수준의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고등학생에게 '논어' 읽기는 녹록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본인의 그릇만큼, 본인의 깜냥만큼의 논어를 만날 것이고, 공자와의 첫 대화를 나눌 것이다.
임채희 대구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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