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환자가 어때서! 갠지즈강에 가보라, 감사하여 살 일이다"
인도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머리는 혼란스러웠고 어지러웠다. 질서, 정돈과는 멀어도 한참 먼 그 여행의 끝에서 그녀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열흘 이상 밤낮으로 먹던 카레에 물렸을 즈음 델리에 한국인이 하는 한국 식당이 있다는 말에 발길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얼큰한 김치찌개 한 사발에 혼란스러움이 조금 가라앉을 무렵 작은 키의 모자를 쓴 여성이 주인이라며 인사를 건넸다. 자신을 암환자라고 소개한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병을 얻어 좋은 점을 이야기했다.
인도의 '자뻑신' 김숙희(64'한국식당 '궁' 대표) 씨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 달 후 서울의 한 병원 근처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한국과 인도를 오가며 진행됐다.
-병을 자랑처럼 말하고 있다.
▶숨겨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내가 죄를 지어 벌을 받아서 생긴 병이 아니지 않은가. 당당하게 밝히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유방암 2기다.
-암환자여서 좋은 점 세 가지를 꼽았다.
▶좋은 점이 많다. 많은 것 중에 세 가지를 골라야 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힘들다.(웃음) 우선 날씬해져서 좋다. 모두들 살 뺀다고 애쓰는데 암에 걸리니 금방 날씬해졌다. 머리칼이 다 빠지니 파마나 염색을 안 해도 되고, 숏커트 스타일이 또 잘 어울려서 좋다. 둘째는 여유로움을 알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쉬어본 적이 없던 내게 암은 '쉼'을 주었다. 암에 걸리고 보니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하기 위해 거름을 주는 농부의 마음이 생각났다. 더 좋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 거름을 주는 시기로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면 병이 난 후에는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 또한 좋은 일 아닌가.
-세 번째 좋은 점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더 늦기 전에 만나볼 사람을 만나고 미워했던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의 귀함을 깨닫게 됐다. 넘어져 보니 안 보이던 것이 보였다. 암은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선물 같은 것이다.
-아주 긍정적이다. 그것이 지금 살고 있는 인도의 분위기와 관계있다고 생각하나?
▶갠지스강에 한번 가보라. 한쪽에서는 주검을 태워 물에 버리고, 그 물을 끼얹으며 새로운 나를 찾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 모두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도 두렵지 않나?
▶병은 그냥 병일 뿐이다. 쉼 없이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라는 신호라고 생각한다. 절대적으로 희망을 갖고 새로운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무섭지 않다. 병을 친구처럼 잘 다스리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이왕이면 당당하게 나아가고 싶다.
-치료는 어떻게 하고 있나?
▶한국에 가서 치료한다. 지난해 1월부터 인도에 두 달 머물며 식당일을 보고, 한국에서 두 달 머물며 항암치료를 하는 식이다. 이달에 항암치료가 끝난다.
-한국에 오면 치료만 하나?
▶아니다. 그동안 못 봤던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친구들을 만나면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 그 시절로 돌아간다. 나 자신을 즐겁게 만드는 시간들이다. 호르몬 억제제를 먹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우울해지고 뼈마디가 쑤신다. 그리고 모든 게 귀찮아진다. 이럴 때면 마음을 업 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업 되는가?
▶치료약을 먹으면 우울해지고 짜증이 난다. 또 항암치료로 기억력도 많이 떨어졌다. 책을 읽고 신문을 보며 단어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매일 마음의 주름살을 펴려고 애쓴다. 아침마다 '고통과 고집과 아집으로 쭈그러진 내 마음을 펴도록 하자'며 주문을 한다. 나이 들수록, 아플수록 아집의 골은 깊어지는 듯하다. 골이 더 깊어지기 전에 펴야 한다. 책을 읽는 것도 내 마음의 주름을 펴는 한 방법이다.
-그래도 힘든 날이 있을 텐데.
▶예술을 한 것에 대해 감사한다. 내 몸과 마음에는 예술적인 감성이 있어 남이 못 느끼는 아름다움을 느낀다.(그는 미술선생이었으며 화가다) 그 힘으로 마음을 정화시키고 어려움을 이겨나간다. 매일 아침 9시면 좋은 글과 아름다운 사진을 수백 명의 지인에게 보낸다. 그들의 답장을 보며 살아있음에 고마워하고 인연에 감사해 한다.
-인도는 어떻게 가게 됐나?
▶2004년 수출입은행에 근무한 남편이 해외지점장으로 나가게 됐다. 베트남, 중국, 인도 세 나라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월남은 너무 작았고, 인도는 신비스러워 가자고 했다.
-인도에 가기 위해 다니던 학교를 퇴직했다.
▶인천에서 고등학교 미술선생으로 있었는데, 인도에 가려고 28년 교직생활을 그만두었다. 말하자면 인도는 나의 '제2의 인생 무대'였다.
-인도의 첫인상은?
▶이상한 나라였다. 19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소, 말, 차가 함께 다니는 혼란스러운 나라였다. 그러면서 최첨단 IT는 굉장히 발달했다. 인프라가 잘 되어 있는 델리는 거의 서울 강남 수준이다. 집값도 강남과 비슷하고, 가게 한 달 세가 1천500만원이 훌쩍 넘는 놀라운 나라다.
-적응하기는 쉬웠나?
▶다음 해인 2005년 델리대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미술을 전공했기 때문에 현지 미술가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교수들이 모두 나보다 어렸다. 2년을 다니면서 델리 미대를 평정했다.(웃음) 모두들 내 패션에 관심을 기울였고 내 그림을 좋아했다. 그러다 뎅기열에 걸렸다. 뎅기열에 걸리면 죽는다. 그때 모든 걸 멈춰 살았다.
-음식점은 어떻게 하게 됐나?
▶한국 음식을 하는 곳이 없어 대사관에 손님이 오면 우리 집에서 식사를 했다. 내가 음식 솜씨가 좀 괜찮다. 그때 왔던 손님들이 이 정도 솜씨면 식당을 차려도 되겠다는 말이 씨가 되어 식당으로 이어졌다.
-인도에서 식당을 오픈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을 듯하다.
▶어려웠다. 11개 부처에서 인가를 받아야 했다. 그때 당시 순수 개인 투자로는 처음이었다. 한국에서 주방장을 데려오고 인도인 직원들을 직접 교육시켰다. 우리 집이 교육장이었다. 10여 명의 직원에게 주방 교육을 시키고, 서비스를 담당하는 직원들은 집 2층에 합숙시키며 예절교육을 가르쳤다. 두 달 동안 교육을 통해 직원들에게 사명감을 가지게 한 후 식당을 시작했다.
-2007년에 오픈했다.
▶이름을 '궁'으로 했다. 한국말로는 손님을 왕처럼 모시겠다는 뜻도 되고, 인도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좋아서 택한 이름이다. 서비스하는 인도인 모두에게 한복을 입혔다.
-그런데 갈비가 주요 메뉴다. 인도인은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 아닌가? 순전히 한국인을 겨냥한 식당인가?
▶역발상이다. 인도인들은 고기를 터부시한다. 그런데 인도도 많이 달라졌다. 갈비를 먹으러 오는 인도인이 많다. 우리 메뉴 중 인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왕갈비다.
-식당이 성공했다.
▶델리에 2군데 있고 델리 근처에 하나 더 있다. 2013년에는 일본 호텔 안에 일식점까지 차렸다. 오픈한 지 2년 만에 맛과 분위기로 신문과 방송에 알려졌다. 직원이 90명이다.
-성공 비결은?
▶성실과 정직이다. 식당을 오픈할 때 우아하게 사장으로 있었으면 편하게 살았을 것이다. 처음 3년은 죽으라고 부엌에서 일만 했다. 남들 골프 칠 때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주방에 불이 나자 몸으로 주저앉아 불을 끌 만큼 독하게 살았다. 밤 12시 이전에는 퇴근한 적이 없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정직하게 운영했다. 일본인들이 인도서 성공하는 것도 정직하기 때문이다. 인도는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4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다고 했다.
▶오전 5시면 일어난다. 기도를 하고 그날의 계획을 짠다. 새해 아침이면 지난해를 반성하고 1년, 3년, 5년 단위로 계획을 짠다. 한 해 한 달 일주일 하루를 쪼개서 계획적으로 살았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한인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한다고 들었다.
▶인도에는 1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상사 주재원들이다. 남편이 4년 동안 한인회 부회장을 하면서 한인회를 정착시켰고, 한인회 회장을 하면서 문화강좌도 열었다. 지금도 한국 학교 설립을 위해 식당매출의 1%를 기금으로 모으고 있다. 온 식구가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퇴직하고 제2의 인생에도 성공했다. 은퇴를 앞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올인해야 한다. 적당히 손과 발을 담가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그 분야의 최고들이 이미 진을 치고 있는 곳에서 승부를 걸려면 죽기 살기로 해야 성공할 수 있다.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은 없다. 올인하고 정직하고 성실하면 끝이 보인다.
-책과 신문 예찬론자다.
▶한국에 오면 책부터 구입한다. 그리고 인도로 보낸다. 책은 최고의 위안이고 선생이다. 역사책과 경영에 관련된 책을 좋아한다. 시도 좋아한다. 신문은 새로운 정보와 지식으로 가득해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한다.
-앞으로 계획은?
▶문화사업을 하고 싶다. 인도에 우리나라 문화를 알리는 것이다. 서양화를 전공했는데 우리 고유의 민속화를 소개하려고 민속화를 배우고 있다. 또 우리 음식을 널리 소개하고 싶다. 전 인도인이 오고 싶어하는, 와서 즐거운 식당으로 만드는 게 꿈이기도 하다. 나중엔 대청마루 큰 집에서 뒹굴거리며 살고 싶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사진 이성근 lily_3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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