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친절한 준표 씨가 되려면

입력 2015-04-11 05:00:00

1982년 전북 익산생. 서강대 언론대학원 재학(미디어교육 전공). 2007년 MBN 입사
1982년 전북 익산생. 서강대 언론대학원 재학(미디어교육 전공). 2007년 MBN 입사

나에겐 아버지에게 세뇌를 당해 생긴 습관 세 가지가 있다. 해가 지고 어두워져도 등을 잘 켜지 않는다. 한겨울에도 웬만하면 보일러를 돌리지 않는다. 화장지를 쓸 때는 처리하는 일에 따라 화장지 칸 수를 정해놓고 상태에 따라선 재활용(?)도 한다. 남들은 이것을 '절약'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내게 이것은 아버지의 '가난'이다.

나의 아버지는 당신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태어난 유복자다. 홀로된 할머니는 아버지와 단둘이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오셨다. 학창시절 아버지는 육성회비 미납으로 망신을 당하거나, 밀린 공납금을 다 낼 때까지 칠판에 이름이 적혀 학교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다가 할머니한테 빗자루로 얻어맞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제일 싫었던 것은 점심시간이었단다. 사정이 나은 날은 그나마 밥 구경을 할 수가 있었고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날엔 물로 배를 채웠단다. 인간 삶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의식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누르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친구들의 시선이었단다. 아버지가 없는 것도 참고, 육성회비를 못내 맞았던 것도 참았지만 밥도 못 먹을 정도의 가난을 보여주는 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단다.

최근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감이 막말을 했다는 논란으로 시끄럽다. 학생들이 모두 모인 점심시간, 교감이 직접 급식비 납부 여부를 검사하며 급식비를 미납한 학생들에게 "내일부터는 오지 마라"라며 다그쳤고, 장기간 급식비를 내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넌 1학년 때부터 몇 백만원을 안 냈어. 밥 먹지 마라"거나, "꺼져라. 너 같은 애들 때문에 전체 애들이 피해 본다"라고 폭언을 했다는 것이다. '눈물 젖은 밥'을 먹고 자란 아버지 시대의 일들이 복지 선진국으로 가겠다는 2015년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슬픈 현실이다.

이 사건을 두고 '경상남도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라는 누리꾼의 댓글이 눈에 띄었다. 이달 초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무상급식 지원 중단을 발표했고 이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여론조사를 보면 '선별적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가 60%, '전면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가 37%로 나타났다. 보편적, 의무적 급식보다는 경제적 형편에 따라 정부 지원에 차등을 둬야 한다는 홍 지사의 논리에 공감하는 쪽이 훨씬 많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질문 내용을 바꿔서 이렇게 물어보니 답이 좀 달라졌다. '경남도지사의 결정을 잘한 일로 보느냐, 잘못한 일로 보느냐'고 묻자 49%가 잘한 일, 40%는 잘못한 일이라고 밝혔다. 앞선 질문에 비해 긍정 의견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이 여론조사에는 무서우리만큼 냉엄한 국민의 판단이 깔려 있다. 가난한 학생에게만 급식비를 주자는 정책의 방향에 대해서는 국민의 다수가 찬성한다. 그런데 경상남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홍준표식 선별급식은 반대 여론이 더 많다. 무슨 뜻일까?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그걸 구현하는 '불도저 방식'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얘기다. 홍 지사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더 섬세하고 친절한 정책을 원한다. 특히 그 대상이 감수성이 충만한 10대라면 더 그럴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청소년들에게는 배고픔과 가난보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증명되는 과정 자체가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고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급식은 단순한 한 끼의 식사가 아니라 교육이고, 나라가 학생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이제 어른들은 올바른 정책 못지않게 가슴 따뜻하고 배려 깊은 행정을 해야 한다. 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홍준표 지사의 스토리가 국민 지지를 더 얻으려면, 그 시절 홍 지사가 가슴으로 느꼈던 열등감과 자존심의 상처가 정책에 녹아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친절한 준표 씨를 원한다.

이정미/mbn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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