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타면 20년…전국 최고수 됐지만 '짬뽕 인생' 도전은 계속됩니다"
2010년 12월 22일 모 방송사 스튜디오에 전국 3대 짬뽕 달인이 모였다. 그날 그들에게는 주어진 시간 내에 자기만의 독특한 짬뽕을 조리하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이들은 전국 짬뽕 맛집 중 엄선된 조리사들. 한 사람은 조리 경력 41년의 대가였고 또 한 사람은 연매출 5억원을 넘는 대박 가게 사장님이었다. 이들 앞에는 교수, 영양사, 맛 칼럼니스트들이 도열해 있었고,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시청자 평가단도 채점표를 들고 참관했다. 짬뽕의 지존을 가리는 이 대결은 장장 6시간 동안(방송은 1시간) 펼쳐졌다. 경기 결과 최종 우승자가 가려졌는데 영예의 셰프는 대구 출신의 김병건(43) 씨였다.
김 씨의 우승은 조리 입문 11년 만에 얻어진 결과로 그동안 전국 최고 맛을 위해 얼마나 고단한 수련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잠작하게 했다. 5년 전의 일이었으니 이젠 그도 그 방면에 중견의 위치에 올라와 있다. 김병건 씨의 '면생면사'(麵生麵死)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자.
◆26세에 중국집 주방을 노크하다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전국 맛집을 평정했지만 그가 처음부터 '셰프 나이프'를 잡은 건 아니었다. 10대 때 김 씨의 꿈은 유도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몸집이 다부지고 체력이 뛰어났던 김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코치들의 눈에 들어 운동을 시작했다.
중'고교 때 이웃 학교에 스카우트될 정도로 실력을 뽐냈고, 경북도 대표로 체전에서 숱한 메달을 땄다. 그러나 운동선수로서의 성장은 거기까지였다. 유도인으로서의 진로가 막히고 미래에 대한 고민이 밀려들 즈음 영장이 날아들었고 그는 미련 없이 입영을 택했다. 1996년 제대 후 김 씨는 판촉물업체, 가구 배달, 영업사원으로 바삐 뛰어다녔지만 세상은 김 씨에게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고민 끝에 김씨는 26세 늦은 나이에 중국집 주방을 노크하게 된다. 고민 끝에 들어선 조리사의 길, 그런데 여기도 만만한 세상이 아니었다.
"처음 들어간 주방에 직원이 세 명인데 전부 저보다 나이가 어렸어요. 모두 6, 7세 아래 동생뻘이었죠. 아시겠지만 주방 군기가 대단하거든요? 이 연하 선배님들 모시느라 맘고생 말도 못하게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리사 일이라는 것이 도제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부분 주방 업무는 단계별로 이루어진다. 처음엔 청소, 설거지를 하다 야채 다듬기, 반죽, 그다음에 조리로 영역을 넓혀가는 식이다. 선배들의 비법 전수는 부뚜막 소금보다 짜다는 것, 여기서도 예외는 없었다. 그래도 김 씨는 싫은 내색 하지 않고 깍듯이 선배들을 모시며 조금씩 일을 배워 나갔다.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 버려진 야채들을 모아 칼질을 배웠고 밤에는 혼자 남아 반죽을 연구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기술자가 되었고 몸값도 비례해서 올라갔다. 특히 수타 쪽에서 기술이 알려지면서 곳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1997년 첫 월급이 50만원이었는데 8개월 후 3배로 뛰었어요. 수타 실력이 소문나면서 큰 중국집 주방장으로 스카우트되었고 그때 월급이 250만원이었어요. 셰프 꿈도 이뤘겠다, 월급도 5배나 뛰었겠다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죠."
◆중국집을 오픈하다, 신용불량자가 되다
이렇게 주방장을 3년쯤 했다. 나름대로 차별화된 메뉴도 개발하고 반죽, 면발도 여러 가지로 응용을 했다. 손님들 반응도 좋았고 매상도 꽤 올랐다. 슬그머니 독립에 대한 유혹이 밀려들기 시작했다.(업계에서는 이를 성공한 주방장의 3년 차 증후군이라고 한다) 독립을 해도 지금의 인기가 그대로 이어질 듯한 확신이 들었다. 2003년 김 씨는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경주서 중국집을 오픈했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에 은행 융자를 얹어 제법 크게 사업을 벌였다.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본 걸까. 김 씨는 1년 후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믿었던 지인에게 배신까지 당해 상심은 더 컸다.
맛으로만 승부하면 될 줄 알았는데 가게 운영은 그게 모두가 아니었다. 사업이 자금, 종업원 교육, 주방, 홀 운영이 맞물려 돌아가는 생물(生物)이라는 걸 알아챘을 때 이미 그는 빚더미에 올라앉은 후였다.
"다시 주방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그때부터 하나씩 복기(復棋)를 해보니 부족했던 점들이 하나씩 보이더군요. 일단 제가 너무 자만했어요. 내 그릇이 대접 만한데 대야 만한 세상을 담으려고 했으니 배탈이 난 거죠." 수천만원에 이르는 비싼 수업료를 내고 첫 번째 경영수업은 그렇게 끝났다.
◆더 이상 실패는 없다, 도전 2라운드
2009년 김 씨는 대구 달서구에 다시 중국집을 열었다. '같은 실패는 없다.' 이번엔 정말 목숨을 담보로 각오를 다졌다. 가게가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한눈팔지 않고 맛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치워 두었던 수타판을 다시 펴고 본격 수타면으로 승부를 걸기로 했다. 체력에 자신이 있었고 면발에 대한 노하우가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손님도 늘고 가게도 자리를 잡아 나갔다. 그런데 대박 조짐은 전혀 엉뚱한 데서 터졌다.
"2008년인가 주방에서 수타 반죽을 하는데 손님들이 재미있어하더군요. 그래서 기존 방식 외에 '파도타기 수타' '용수 수타' 같은 퍼포먼스를 조금씩 시작했는데 손님들이 그것을 블로그, SNS에 올리기 시작한 거예요."
몇몇 방송사에서 연락이 와 전파를 타기 시작했고 얼마 후 운명의 달인 대결까지 펼친 것이다.
전국 최강 3인방은 요리 대결에 앞서 개인기를 먼저 펼쳤다. 달인들의 현란한 '불쇼' '칼쇼'는 지금도 SNS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김 씨는 수타 기술로 승부를 걸었다. 이때 선보인 기술이 '파도타기 수타'. 파도타기란 반죽 한쪽을 고정시킨 후 한 손으로 반죽을 3, 4m 물결처럼 날리면서 공중에서 면을 만드는 기술이다. 이어서 선보인 용수 수타는 '용의 수염'을 줄인 말로 바늘귀에 들어갈 만큼 가늘게 면을 뽑아내는 기술을 말한다.
이어 벌어진 짬뽕요리 경연에서 판정단의 엄정한 심사를 거쳐 김 씨는 영예의 1위를 차지했다. 이때 김 씨가 선보인 요리가 해물짬뽕, 볶음짬뽕, 불로장생짬뽕 3종 세트. 이 요리들로 전국 짬뽕의 최고수가 된 것이다. 그는 응원 나온 직원, 가족들과 함께 울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수고와 노력의 결실인 것 같았다.
방송 이후 김 씨의 가게는 짬뽕 대박집 대열에 합류했다. 하루 매상이 500만원을 넘어서고 종업원 12명을 풀로 가동할 정도로 손님이 붐볐다.
"전국에서 맛집 블로거, 탐방객들이 연일 몰리고 심지어는 뉴욕에서 교민이 일부러 찾아오신 적이 있었요. 지금도 대구에 출장 올 때마다 들르는 전국의 단골들이 꽤 됩니다."
그에게 도전은 운명인가보다. 최근 김 씨는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짬뽕집 체인점을 구상하고 있는 중이다. 지역 짬뽕을 위해 조금 더 역할을 했으면 한다는 주위의 충고도 많이 들었다. 김 씨도 무척 망설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 더 큰 맛, 큰 시장을 위해 발을 내디뎠다. 편안한 길을 버리고 도전의 길을 선택한 김병건 씨. 그가 어떤 길을 가던 그 길은 결국 짬뽕과 통할 것이다.
한상갑 기자 arira6@msnet.co.kr
※전국, 대구의 짬뽕 맛집은?
'중독 주의.' 국물의 치명적인 유혹만큼이나 짬뽕의 열풍은 전국적이다. 골목마다 맛집 아닌 곳이 없고 웬만한 점포에는 원조 간판이 걸려 있다. 전국, 대구의 짬뽕을 간단히 정리해본다.(인터넷에 나와 있는 자료를 근거로 했음)
▶전국 5대 짬뽕-군산 복성루, 강릉 교동반점, 공주 동해원, 평택 영빈루, 대구 진흥반점(휴업 중).
▶대구 3대 짬뽕-진흥반점(남구 이천동), 대동반점(북구 대현동), 가야성(가야기독병원 근처), 수봉반점(북구 대현동), 해동성(송현역 근처) 등이 경합한다. 블로거나 평가자에 따라 다르지만 이 범위에서 대체로 일치한다. 이 외에 신신반점(두류네거리), 짬뽕집(수성구 두산오거리), 몽짬뽕(수성구 지산2동), 마차이짬뽕(신천시장), 유창반점(신남역 근처) 등이 인터넷 맛집에 많이 오르내린다. 한상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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