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사람·개

입력 2015-04-04 05:00:00

경북대 고고인류학과·경북대 대학원 영문학 석사
경북대 고고인류학과·경북대 대학원 영문학 석사

몇 년 전, 한 웹사이트에서 큰 논쟁거리가 발생한 적이 있다. 내용인즉 이렇다. 큰 홍수가 났고 당신이 뗏목을 타고 표류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만약 그때 뗏목 옆으로 '생면부지의 사람'과 '키우던 개'가 떠내려가고 있고, 어느 한 쪽만 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하는 딜레마다.

개를 키우지 않는 사람은 이 문제가 애초에 어떻게 '딜레마'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 것이다.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번연히 알면서도 개를 건진다?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럼에도 이 문제가 인터넷상에서 '사이버 예송논쟁'이라고까지 불리며 난리가 난 데에는 이런 문제에 예민해져 있던 애견인들의 진지하고 격렬한 반격이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솔직히 나로서는 아직도 완전히 이해가 가진 않지만, 이들의 주장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일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개를 오래 키우다 보면 그 동물이 의사(擬似)한 가족처럼 느껴져서 사람보다는 그 녀석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주장 말이다.

결국 서로를 인신공격하고 사이코패스로 몰고 하는 등의 대소란으로 이 인터넷상의 논쟁은 흐지부지되었다. 그 와중에 나는 "개를 선택한 자들은 다 인간 쓰레기들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인 자들에게 약간은 반감이 생겼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우리 인간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효용의 추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쓸데없이 이 '개'라는 녀석을 우리가 아끼는 어떤 다른 물질로 대체한 가정을 해 보기로 한다. 과연 우리는 이 '개를 구한 자들'보다 윤리적인 인간일까?

일단 최신형 휴대폰 정도라면 어떨까? 선택은 물론 사람이다. 그다음, 가족과 이번 여름에 떠나기로 했던 9박 10일의 유럽여행권. 이 경우에도 속은 쓰리지만 일단 호생지덕을 쌓아야겠지. 그다음은 자신이 소유한 자동차. 좀 애매해진다. 내 추측에 어찌 사람을 살리지 않고 개를 구하느냐고 호통을 치던 호인들 가운데 묵묵히 자신의 세단을 건져 올릴 사람이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집(혹은 전세금)이 나왔다. 전 재산인데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 하나 살리고 가족의 공동 보험인 부동산을 날린다면? 그래 여기까지. 만약 집과 모르는 사람이 동시에 떠내려 온다면 우리는 집을 건질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을 빠뜨린 것도 아니고, 단지 구해주지 못한 것뿐인데, 어쩌겠나.

미쳤냐고? 어찌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차나 집을 건질 생각을 하냐고? 좋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그럼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당신이 한 달간 즐길 술'커피'담뱃값이면 수십 명의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구명할 수 있을 텐데,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마당에 왜 그런 기호를 즐기고 계시나?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니니 그런다고? 그럼 이건 어떤가? 돈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은 결국 100만원이 없어서 죽는다. 그러면 자살 직전에 몰린 어떤 노숙자가 불쑥 당신에게 찾아와서 "나 죽을 것 같으니 100만원만 주세요" 하면 당신은 돈을 주는가? 적어도 나는 그럴 확신이 없다. 그 대신에 우리가 하는 선택은 '왜 하필 내가?' 혹은 '돈을 줘도, 저들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아'라고 위안하며 끊임없이 스웨덴제 유모차니, 스마트 TV니 이따위 것들을 뱃간에 건져 올리는 것이겠지. 이쯤 되면 사실 키우던 개는 사람 목숨을 대신할 사치품치고는 고상한 편이다. 그래도 생명 아닌가.

나는 인간성의 회복 같은 것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인간성은 도덕을 강조했던 과거보다 인간의 이기심을 강조하는 오늘날에 오히려 급속도로 좋아지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야 하는 것은 '대책의 마련'이다. 우리가 조금씩 양보해 공적인 체계를 마련하고 그 틀로 떠내려가는 인간의 구명에 나선다면, 효용 지고(至高)의 이 문명 속에서도 "구해주면 나태해져" 따위의 변명보다는 훨씬 더 세련된 위선을 떨 수 있지 않겠나.

박지형/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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