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달래주는 他者 존재 필요한 인간
공감 부족, 인정 받으려 타인 눈치 봐
잘못 없어도 비난 받을 수 있는 게 세상
상처 안 받으려면 만신창이 될 각오해야
약 100년 전 어느 정신과 의사가 풀어낸 설(說)이 최근 일본과 우리나라의 서점가를 강타하고 있다. 일시적 열풍(熱風)치고 좋은 것 못 봤으나 거짓부렁과 희망고문의 촘촘한 경계를 오가는 자기계발서의 그것보다 좋아 보인다.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비교하고 스스럼없이 남을 착취하는 나라. 자존감을 도둑질해도 그 행위가 경제적 부흥만 보장된다면 눈감아주는 나라. 정서폭력을 당해 관공서에 신고하면 위로는커녕 훈계를 들어야 하는 나라. 잔인하리만치 경직되고 이율배반적인 가치관들이 득실대는 나라. 강박과 악성 자기애(自己愛)로 얼룩진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라'는 그의 메시지는 우왕좌왕하며 헤매던 이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진료실 상황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 모를 자기비하, 공허감과 폭식, 중독 또는 도착(倒錯)에 빠지는 비전형적 우울증이 이전에 비해 압도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자 프로이트는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며 영혼 없는 얘기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집단을 묘사하며 사실상 치료가 불가하다고 기술한 바 있다. 감정이 치료의 핵심인데 이들은 진솔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100년이 지난 현재도 마찬가지다. 힘에 대한 갈망을 도덕보다 우선하며 타인에 대한 착취를 서슴지 않는 냉혈한(冷血漢)이 점차 늘고 있다. 악성 자기애 인격의 소유자들이다. 감정을 부정하는 길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터득한 덕에, 이들은 한 번 잘못하면 죄인이고 한 번 실수하면 바보가 되는 우리나라 특유의 비교 문화 속에서 여유롭게 지내고 있다. 겉모습만 사람일 뿐 몸속에는 냉정한 괴물이 존재하는 스티븐 킹 원작 이나 일본 애니메이션 를 비롯해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좀비, 뱀파이어 관련 영상물이 인기를 얻는 것 또한 이런 까닭인지도 모른다. 내면 모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건강한 자기애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 중심엔 역시나 결핍이 있다.
굳이 사회적 동물이란 표현을 빌리지 않아도, 정신의학에서 바라본 인간은 모종의 반응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완전한 정서적 독립은 애당초 불가하며 나를 봐주고 달래주는 타자(他者)의 존재는 늙어 죽을 때까지 필요하다. 하지만 인정욕은 경계해야 한다. 모종의 반응이란 것이 반드시 인정이나 칭찬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감(共感)을 향한 갈증과 인정욕구는 다르다. 비유하자면 공감은 우리가 은연중 들이마시는 산소와 같다. 관계의 동물인 인간에겐 없어선 안 되는 것이다. 반면 인정욕은 바닷물과 같아 마실수록 갈증은 더 심해져 인정 중독에 빠진다. 반면 공감은 초월적 심혼(心魂)을 응집시켜 '더 큰 나'로 성장시킨다. 인정이 아니라 공감을 받을 때 우린 한층 더 건강해지나, 공감적 반응의 결핍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지푸라기 같은 인정을 원하는 것이다. 고로 성취나 주변 시선의 인정에서 나를 찾으려는 건 심리적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오늘도 타인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지내고 있다. 주변인으로부터 행여 미움을 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결국 미움 혹은 손가락질당할 용기가 필요하다. 기꺼이 상처받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야 하는 게 인생이다. 잘못한 게 없어도 비난받을 수 있는 게 세상이며 씁쓸하지만 우린 이 사실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생채기 하나 안 나고 살려면 그냥 좀비처럼 지내는 수밖에 없다.(그래서 난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행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만신창이가 될 각오가 필요하다. 배려와 희생과 같은 덕목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나를 둘러싼 공동체를 향한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미움받을 수 있음을 기꺼이 수용할 때 세상은 우리에게 그만큼의 자유를 허락할 것이다.
김현철/정신건강의학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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