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결투는 명예와 자존심에 근거
권력자들은 암수로 정적 살해 '대조'
넴초프의 죽음도 권력 암투에서 비롯
푸틴 등장 후 비겁한 암살정치 더 난무
유럽에서는 이미 철 지난 것으로 치부되던 결투가 러시아에서는 19세기, 심지어 20세기까지도 공공연히 유행했다. 작가들은 작품에서 결투를 종종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결투로 목숨을 잃기도 하고, 상대를 죽이기도 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로 잘 알려진 푸시킨은 자기 아내와 염문설이 나돌던 프랑스 장교와 결투를 벌여 치명상을 입고 서른일곱의 나이로 사망했다. 성자 같은 이미지의 톨스토이도 젊은 시절 여러 번 결투를 했고 상대를 죽이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러시아의 결투는 유럽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보통 두 사람 중 하나가 목숨을 잃을 때까지 계속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목숨을 건 도박에 '러시안 룰렛'이라는 이름이 붙었겠는가! 일견 황당해 보이지만, 이러한 결투 문화는 명예와 자존심을 추구하는 러시아적 전통에 근거한다. 모욕을 준 인간과 같은 세상에 사느니 그를 없애거나, 아니면 내가 죽는 것이 차라리 명예롭다는 것이다. 승리는 나의 올바름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고, 패배로 인한 죽음 역시 명예로운 것으로 여겼다. 부끄러운 것은 결투를 피하거나, 피하는 상대의 뒤를 쏘는 것이었다.
그런데 권력자들은 이런 결투의 전통과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정적의 뒤통수를 치고, 암수로 적들을 제거했다. 그것이 친구든, 형제든, 아내든, 남편이든, 자식이든! 표트르 대제는 섭정하던 누이를 요새에 가두고, 자신에게 반대하던 친아들을 고문으로 죽였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남편을 폐위시키고 대신 황제 자리에 올랐으며, 정부를 시켜 남편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스탈린은 멕시코까지 자객을 보내 뒤통수에 아이스피켈을 꽂아 한때는 동지였던 트로츠키를 암살했다.
푸틴이 권좌에 오르고 나서 그의 정적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최근 야권 지도자 넴초프 피살로 다시 한 번 살펴본 이 '죽음의 명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푸틴의 정적인 베레조프스키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오히려 이를 폭로하고 영국으로 망명했던 전직 FSB 요원 리트비넨코는 2006년 희귀 방사능 물질에 중독되어 사망했다. 2013년 런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베레조프스키는 자살했다고 보도되었지만 실은 사인이 불분명하다. 푸틴에게 적대적인 기사를 쓰고 체첸 전쟁을 반대하던 인권 기자 폴리트코프스카야는 푸틴의 쉰일곱 번째 생일날 자기 아파트에서 총격으로 사망했다. 체첸 문제를 다루던 인권변호사 마르켈로프가 인터뷰 직후 모스크바 시내에서 피습, 살해된 것도 유명하다. 그래서일까! 겉으로는 푸틴과 사이가 나쁘지 않은 첼시 구단주 아브라모비치는 잠깐 이동할 때도 수십 명의 경호원을 대동하며, 개인 요리사가 만든 음식 외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고 한다.
넴초프 살해 용의자들이 속속 체포되고 있다고 전해진다. 도대체 그들의 배후는 누구일까? 푸틴 직접 개입설, 푸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누군가가 나섰을 가능성, 또는 푸틴의 이미지를 훼손하기 위한 서방의 음모설, 치정설, 심지어 이슬람국가(IS) 배후설까지 다양한 가설이 나오고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넴초프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최고 권력자인 푸틴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넴초프의 죽음은 정치권력 간 암투의 결과물이며, 뒤통수를 몰래 가격하는 비겁한 암살 정치는 푸틴 등장 이후 더욱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이미지는 이중적이다. 높은 수준의 문화 예술에 비해, 빈부 격차, 인권 부재, 관료주의와 후진적인 정치체제라는 모순적인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다. 최근 넴초프 살해 사건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적을 명예로운 결투의 장으로 소환하지 않고, 무장해제된 상대를 몰래 치는 권력자들의 암투가 지속되는 한, 러시아 정치는 그 문화 예술이 거둔 명예로운 성과를 영원히 따라잡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윤영순/경북대 교수·노어노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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