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봄을 꽃피울 너에게.
기억나니? 이런저런 인문학 행사로 정신없이 바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너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지. "쌤,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근데 요즘 왜 이렇게 인문학이 난리인 거죠?"
생뚱맞은 너의 질문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지. "대통령님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단다."
그러나 인문학이 정부의 중요 국정과제로 여겨지든, 문화융성위원회의 8대 과제 중 제일 먼저 제시되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한순간에 사그라질 상업성이라거나 이질적인 학문 간의 치열한 밥그릇 싸움으로 폄하되거나 경쟁과 효율의 한계에 봉착한 우리 시대의 요구라고 불리는 등 세상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다. 그저 스무 살의 봄을 꽃피울 네가 쉽사리 해답을 내어놓지 않을, 어쩌면 영원히 답을 주지 않더라도 치열하게 인문학의 화두를 물고 늘어져 보았으면 좋겠다.
곧 다가올 스무 살의 봄으로 설렘과 기대에 찬 너를 보며, 나의 스무 살을 떠올려 본다. 스무 살의 봄은 아름다울 줄 알았다. 이와이 순지가 감독한 영화 '4월 이야기'의 유명한 엔딩 장면처럼, 하늘하늘 흩날리는 벚꽃 송이처럼 스무 살의 일상은 눈부시게 찬란할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무심히 지나가는 발자국에 으깨진 버찌처럼 날것 그대로 드러나는 민망함이었다. 카메라 광고의 카피처럼 스무 살의 배경은 어둡고, 스무 살의 발걸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편집 기능은 없었다. '좋을 때다'는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가슴에 콕콕 박혔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젊음과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는 자신을 매섭게 자책했었다.
어른이라 하기에는 어설프고, 아이라 하기에는 낯 뜨거운 시절이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들처럼 주체할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넘나들며, 주기적으로 '전신 무기력증'이라고 스스로 붙인 병명 앞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 나날이 침잠했었다. 술을 마시며 어른 흉내를 내봐도, 스쳐 지나가는 풋사랑을 해봐도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의 허기는 그대로였다.
그렇게 스무 살의 봄은 이유도 모른 채 무겁게 흘러갔었다. 그렇게 교과서 앞에서 비스듬히 던져 버린 사춘기의 방황과 입시 앞에 유예시킨, 뒤늦은 정체성 찾기가 시작되었다. 책이 아닌 세상이,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이, 오직 직접 부딪치고 시행착오로만 배울 수 있는 관계 맺기가 갑자기 '툭' 하며 내 앞에 떨어졌었다. 힘들고 부대꼈다. 한참이 지나서야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묘한 외로움의 실체가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스무 살에도, 스무 살의 곱절을 산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이 물음에 '모르겠다'는 답을 내놓는다. 일흔이 넘은 먼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그러나 스무 살의 너는 이 인문학의 화두를 가슴 깊이 품은 채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세상과 소통하였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유난스러운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스무 살의 봄을 밝히고, 스무 살의 불안과 상처를 보듬었으면 한다. 하염없이 이 물음을 곱씹으며 생각의 결이 깊어졌으면 좋겠다.
인문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현미경이 될 수도, 망원경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색안경이나 돋보기처럼 세상을 왜곡하고 과장되게 보여줄 수도, 어쩌면 네 눈을 가리는 안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인문학으로 너의 스무 살의 봄을 생기 있게 꽃피웠으면 한다. 비록 시간 앞에 덧없이 쓰러져 끊임없이 허무함이 밀려올지라도, 영원한 물음표를 내어 놓을지라도 인문학으로 피어날 너의 스무 살의 봄을 아낌없이 만끽하였으면 좋겠다.
임채희 대구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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