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사람 이야기 모으니, 그 모든 게 자산이 되더라고요"
공동체가 무너지는 시대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의 삶은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흔히 찾을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삭막한 풍경이다. 칠곡군은 마을마다 '인문학' 화두를 던져 공동체 문화를 회복하는 곳이다. 14개 마을 사람들이 조합원으로 참가해 '인문학마을협동조합'까지 만들었을 정도다.(본지 1월 30일 자 33면 보도) 이 사업의 처음과 끝을 함께하는 칠곡군청 교육문화회관 평생교육담당 지선영(46) 계장을 10일 칠곡에서 만났다.
◆함께 잘 사는 것, 마을 인문학
칠곡군 평생학습관 1층에서는 '인문학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배우고 느낀 것을 공유하는 소박한 전시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동네 할머니들이 쓴 시다. '내 나이 21세 결혼해서 첫아들 하나 나앗서 7곱살에 교통사고로 제먼 세상을 먼저 보내요.' 맞춤법도 맞지 않는 삐뚤빼뚤한 시에는 할머니의 인생과 감성이 담겨 있다. "인문학이라고 하면 서양 철학자나 '문사철'(문학'역사'철학)을 먼저 떠올리죠? 우리 군의 인문학은 이게 아니에요. 마을과 사람의 이야기가 곧 인문학이에요." 지 계장이 마을 인문학을 명쾌하게 정의했다.
칠곡군이 인문학을 마을에 녹이기 시작한 것은 2004년. 당시 '평생학습도시'로 선정되면서 관과 주민이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각 마을의 자산을 찾는 데 주력했다. 이들은 거창한 이념보다 '즐겁고 재밌게 사는 법'을 함께 연구했다. 어떻게 인문학을 군을 대표할 브랜드로 택했을까. 지 계장은 "칠곡군은 대게, 단감, 간고등어처럼 내세울 특산품은 없다. 하지만 최고의 브랜드가 '호국평화'이고, 이 무형의 자산을 브랜드화했다"고 설명했다. 칠곡군은 6'25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로 불리는 다부동 전투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마을의 자산을 찾으려면 먼저 주민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했다. 요즘은 장례도 상조 회사에 맡기지만 과거엔 이웃이 힘을 보태 지내는 것이 흔한 풍경이었다. "약목면 남계리는 '초롱계' 역사가 있는 동네예요. 초롱계는 누가 상을 당하면 이웃들이 각 집에 초롱불을 붙여 길을 밝히고, 장례를 함께 돕는 모임이었어요. 이 동네 이장님이 거의 100년 된 '계첩'을 갖고 있었는데 여기엔 '계비로 100환을 냈다'는 이야기부터 상부상조하는 내용이 구구절절 적혀 있었어요. 초롱계를 다시 되살리고 싶어 계원이었던 어르신 13명의 자손들을 찾아가 함께 모이는 날을 만든 것이 남계리 인문학의 시작입니다."
◆두 손 맞잡은 아파트와 전통마을
현재 칠곡군의 인문학 마을은 총 14개. 이 중 5곳은 아파트 마을이다. 인문학은 각 마을의 공동체만 회복시킨 것이 아니라 전통마을과 아파트를 잇는 다리 역할도 한다. 마을 학교를 만든 석적읍 '부영아파트'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아파트는 2천600가구 규모의 대단지 아파트로 산업단지가 몰린 구미 바로 옆이라 젊은 인구가 많다. 지 계장은 "이 아파트는 주민 평균 연령이 30세 정도인 젊은 집단"이라며 "젊은 엄마들이 함께 아이를 키우는 '공동 육아'를 시작하며 뭉치면서 아파트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 아파트 엄마들은 손재주가 좋아서 '부영사단'이라는 별명도 있다. 하지만 신세대 엄마들 솜씨가 아무리 좋아도 농사에는 서툴렀다. 아파트 화단에 아이들을 위한 작은 농장을 만들려고 하다가 참담한 실패를 맛봤다. 모래흙이 가득 차 있는 화단을 보고 혀를 차던 전통마을 이장님들이 아파트로 당장 출동했다. 지 계장은 "아파트 사람들은 농사짓는 법을 모른다. 농사 전문가인 전통마을 어르신들이 트럭 한가득 흙을 싣고 와서 화단을 다 정비해 주셨다"고 설명했다. "대신 시골 구경을 좀체 할 일이 없는 아파트 아이들은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러 전통마을에 놀러 가서 활력을 불어넣는 식으로 아파트와 전통마을이 연대하고 있습니다."
14개 마을에는 총 55명의 마을 강사가 있다. 마을 강사는 외부에서 초빙하지 않고 각 공동체 안에서 자급자족한다.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종이접기나 공예를 가르치고, 부녀회장이 남자들에게 '생존 요리법'을 알려주는 식이다. 이렇듯 인문학은 배움을 기반으로 한다. 지 계장은 '아버지 요리 교실'을 예로 들어 인문학적 배움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 마을이 생각하는 인문학적 배움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겁니다. 혼자 요리해서 먹고 끝나는 음식 만들기는 어디서든지 할 수 있고 그건 취미 강좌지요. 아버지 요리 교실은 시작부터 달라요. 할머니가 없으면 밥상도 안 차리는 할아버지들, 혼자 술을 자주 드시는 홀몸 어르신들을 모아 된장찌개, 계란말이 만드는 법을 가르쳐 건강을 챙기게 하고, 할머니를 초대해서 밥상을 차려 대접하며 마을을 화목하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요리 교실이 끝난 뒤 한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별것도 아이구만 여편네들이 이렇게 유세를 떨었나?' 이 한마디에 온 마을 사람들이 또 웃는 거죠."
인문학은 마을을 변화시켰다. 가장 큰 변화는 사람에 대한 배려다. 우리 사회는 노인을 보살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가산면 학상리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책도서관'을 운영하고, 휴먼시아 아파트는 삯바느질 전문가인 할머니에게 수의 만드는 법을 배워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할머니들이 풀어놓은 인생 이야기에 작가들을 투입해 글과 삽화로 엮어 동화책을 만들기도 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할머니한테 물어서 정보를 캐낼까' 고민해요. 우리끼리 '할머니 앵벌이 시켜서 벌어먹고 사는 것 같다'고 농담도 합니다. 할머니 한 분이 마을회관에 그냥 앉아 계시면 귀찮은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는데 우리 마을에서는 할머니들이 가장 귀중한 존재예요. 공동체에서는 누구나 꽃이고 주인공이지요." 칠곡군이 지향하는 인문학은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삶 속에 있었다.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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