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둥지 튼 사람들] ⑥이영진 코넬비뇨기과 원장

입력 2015-02-13 05:00:00

10년 넘은 단골 환자 많아 대구 사람들 의리 반했죠

대구에서 남성들을 위한
대구에서 남성들을 위한 '맨스 요가'를 만들고 싶어하는 이영진 코넬비뇨기과 원장. 진료실에서 요가 자세의 하나인 '티티바아사나'(양손으로 책상을 짚고, 다리를 양쪽으로 드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우태욱 기자 woo@msnet.co.kr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회색으로 '깔맞춤한' 이영진(45) 코넬비뇨기과 원장은 등장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냈다. 손목에는 금팔찌 두 개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제가 좀 특이합니다"라며 쑥스러운 듯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이 원장은 지금껏 독특한 개성과 특유의 역마살 때문에 오랫동안 한 지역에 머무른 적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대구만은 달랐다. 2003년 처음 대구에 병원을 개원한 뒤 그는 지금까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대구 사람들의 끈끈함이 그를 붙잡았다고 한다. 이달 2일 대구의 한 레스토랑에서 '그의 대구 이야기'를 들어봤다,

◆떠돌이에서 대구의 비뇨기과 의사로

이영진 원장은 '뜨내기'였다. 경북 왜관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적에 떠나 고향에 대한 기억은 없다.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마산, 창원, 부산 등 여러 도시로 이사를 다니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잦은 사업실패로 집안 형편은 늘 좋지 않았다. 수업료를 제때 내본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가난이 싫어 이를 악물고 공부했고, '의사'가 되고픈 희망을 싹 틔웠다. "비뇨기과 의사를 하면서 풍족하게 사는 큰 외삼촌을 보면서 비뇨기과 의사가 되고 싶다고 늘 생각했어요."

고교 졸업 뒤 꿈꾸던 의대를 지망했지만 아쉽게 떨어졌다. 이후 1년간 나 홀로 독학을 한 결과, 이 원장은 부산대 의과대학에 합격했다.

그의 떠돌이 생활은 2000년 비뇨기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한 뒤에도 이어졌다. 경남 거창보건소에서 공중보건의로 2년을 보낸 뒤 서울, 창원, 통영 등으로 옮겨다니며 병원생활을 했다. 1년 이상 머문 병원이 없었다.

"병원마다 특화된 기술이 모두 달라요. 다양한 전문기술을 쌓기 위해, 발 닿고 연 닿는 곳을 찾아다녔어요. 그렇게 여러 병원을 다니다 보니 제 병원을 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군요."

이 원장은 1년간 전국을 다니며 첫 개원지를 물색했다. 서울, 대전, 인천 등 안 가본 곳이 없었다. 병원을 차릴 자리가 생겼다는 말이 들리면, 달려가 입지 경쟁력을 분석했다. 그래서인지 병원 자리를 보는 안목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방황하던 이 원장이 첫 개원지로 선택한 지역이 바로 '대구'였다. 처가가 대구에 있었던 터라 대구 사람들의 끈끈한 의리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지역민들의 신뢰만 얻는다면, 사람들이 '찾아오는 병원'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여기에 사통팔달 뚫린 시내 교통망을 갖춘 대구의 지리적 이점은 그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전국의 주요 대도시들과 교통망이 잘 뚫려 있을 뿐 아니라 시내 교통도 원활한 편이죠. 시내 교통이 복잡한 서울이나 부산과 달리 대구는 권역별 순환이 잘 이뤄지죠. 열심히만 한다면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의 환자들을 그러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구 NO.1, 대한민국 최고라는 자부

대구에서 대박을 점친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2003년 12월 대구MBC 네거리 인근에 개원한 이 원장의 병원은 나날이 번창해갔다. 병원을 한 번 찾았던 환자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 뒤에도 그의 병원을 다시 찾았다. 이 원장은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의 40%는 다른 지역에서 온 환자들이다. 10년 넘은 단골도 많다"고 자랑했다.

물론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개원 뒤 처음 몇 년간은 점심시간도 줄여가며 진료를 했다.

늦은 밤에도 요도염 등으로 비뇨기과를 찾는 응급환자가 생길 때면 서슴지 않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지성이면 감천, 그렇게 이 원장과 좋은 인연을 맺은 지역민들은 잊지 않고 그를 다시 찾곤 했다. 단골 고객이 된 그들은 가족 또는 이웃과 함께 다시 병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깜짝 놀랐어요. 대구 사람들은 '한 번 내 의사다'라고 여기면 그 믿음이 끝까지 이어지더군요.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어서 저 역시 더욱 노력하게 되고요. 대구 사람들의 이런 끈끈함 덕분에 주변에서는 '대구에서 잘 되는 병원은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병원'이라는 말까지 나와요."

그는 '메디시티 대구'의 미래를 밝게 그리고 있다. 그 이유로 의료도시로서 성공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원장은 "대구는 이미 기본적인 대도시의 인프라는 갖추고 있다. 또 모발이식이나 성형 등 일부 분야에 대해 대구는 다른 지역보다 높은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며 "대구시가 특화된 분야를 중심으로 의료산업의 저변을 넓혀간다면 세계적인 의료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대구에서 '맨스요가'를 꿈꾸다

이 원장은 대구에 정착한 것에 대해, 자신 있게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대구에 살게 되면서, 그가 꿈꾸던 모든 바를 뜻대로 이뤘기 때문이다. 우선, 어렸을 적부터 꿈꾸던 비뇨기과 의사가 되어 자기만의 병원을 여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쌓은 기반은 그가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다.

현재 이 원장은 의사 외에도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이며, 온라인 포털사이트의 '파워지식인'이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해 매주 비뇨기과와 관련한 글을 한 편씩 쓰고 있다. 이러한 글을 모아 전자책도 출간했다. 지금까지 집필한 책만 2권. 올해 5월쯤에는 세 번째 책도 출간할 계획이다.

앞으로 쓰고 싶은 책에 대한 계획도 벌써 세웠다. 남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요가 방법을 소개하는 '맨스 요가' 책이다. 이 책의 구상은 그의 경험에서 나왔다. 이 원장이 바로 '요가 매니아'이기 때문이다. 그는 8년째 매일 3시간씩 요가를 하고 있다. "요가를 한 뒤 허리도 좋아지고 몸매도 운동선수처럼 탄탄해졌다. 병원에서도 환자가 없을 때는 수시로 요가를 한다"며 기자에게 요가로 다져진 근육을 한껏 뽐냈다.

신문이나 의료 포털사이트에 비뇨기과에 관한 칼럼을 쓰는 일도 주요 일과 중 하나다. 2009년부터는 네이버에 비뇨기과 관련 질문이 올라오면 의료 전문지식인으로서 답변을 달아주고 있다. 이 원장은 "사람들은 성에 대한 궁금증이 많지만 병원을 찾아와서 상담하길 꺼려,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한다"며 "하지만 잘못된 의료지식을 접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바로잡고 싶어 온라인을 통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이 대구에 둥지를 튼 지 올해로 14년이 됐다. 떠돌이 인생 47년 중에 대구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길다. 이제 그는 대구를 떠날 생각이 없다. 대구가 '제2의 고향'이자 '꿈의 터전'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도 대구에서 꿈을 꾸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기획취재팀 신선화 기자 freshgir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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