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현답(愚問賢答). 어리석은 질문을 현명한 답으로 재치 있게 넘긴다는 뜻의 사자성어이다. 그런데 최근 또 다른 의미의 우문현답이 정치권에서 유행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요즘 '우문현답'이라는 말의 새로운 뜻이 나왔다고 하는데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 이렇게 된다"고 밝혔다.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탁상공론이 얼마나 위험한지 강조하기 위한 걸로 보인다.
이 언급이 나온 지 3일 만인 지난달 29일 박 대통령은 인천에 있는 한 어린이집을 방문했다. 대통령은 어린이집 곳곳을 점검했고 현장 목소리를 들으며 교사들의 열악한 처우에 대한 개선을 약속했다. 대통령이 몸소 '우문현답'을 실천하고 있음에 감동했다.
대통령의 현장 방문 소식을 전하며 박 대통령이 찾았다는 어린이집을 유심히 보았다. 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저긴 어느 어린이집이란 말인가. 20~30여 명이 모두 모여 회의를 할 정도의 넓고 쾌적한 실내, 아이들이 완전한 동심에 빠져들 수 있도록 알록달록 예쁘게 꾸며진 공간, 차고 넘치는 장난감들, 엄마인 내가 꿈꾸던 '꿈의 어린이집'이 아닌가.
박 대통령은 "보육 정책은 학부모님과 아이들 입장에서 찾아야 하고, 선생님들의 시각에서 정책들을 다시 한 번 재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CCTV도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라면서 어린이집과 학부모 간의 신뢰 형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모든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 현장엔 문제도 없었고 답도 없었다.
박 대통령이 찾은 어린이집은 지자체에서 설치해 시민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선생님과 학부모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모범 사례로 꼽히는 어린이집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우리 아이들이 먹고 자고 생활하는 어린이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학부모 대표는 대통령에게 "이 동네에서 참 괜찮고, 평판이 좋은 어린이집으로 소문이 나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도 "이런 데서는 굳이 CCTV가 필요 없겠다"고 답할 정도였다.
대통령은 무엇 때문에 어린이집 현장을 방문했던 걸까? 이런 어린이집에서 도대체 어떤 문제점을 깨닫고 정부 정책에 반영할 수 있을까? 참모들이 문제였다. 실상을 적확하게 볼 수 있는 열악한 어린이집을 택했어야 했다. 그래야 어린이집에 대한 실효성 있는 대책을 대통령이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참모들이 국가 지도자의 눈을 막고 귀를 가린 셈이다. 2013년 말 기준으로 보건복지부가 집계한 국공립어린이집은 전체의 5.3%밖에 되지 않는다. 시설 대부분은 열악하거나 영세한 처지라는 뜻이다.
현장을 방문한 시기도 늦었다. 어린이집 폭행은 인천광역시에서만 지난해 11월과 12월에 이어 1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부모들을 안심시킬 대책을 거의 내놓지 않았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어린이집을 확충하겠다"던 대통령의 공약도 공허한 메아리였다. '우문현답'이 그토록 중요했다면 폭행사건이 반복되던 지난해 선제적인 조치가 있었어야 했다.
이렇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번 어린이집 방문은 보여주기에 그쳤다는 평가다. 하락하고 있는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을 의식한 행보로 해석된다. 진정으로 현장에서 답을 찾으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반 박자 먼저 움직이고 국민 삶의 적나라한 모습을 살폈어야 했다. 우문현답은 공직자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자세이지만, 엉뚱하거나 적절치 않은 현장을 찾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그게 전부인 것처럼 판단해 잘못된 처방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문현답을 찾다가 우문무답(우리의 문제에는 답이 없다)으로 결론이 난다면, 현장을 안 가느니만 못할 것이다.
이정미/MBN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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