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새론새평] 어떤 복고 취향

입력 2015-02-05 05:00:00

갈등을 생산적으로 푸는 게 정치, 진보·보수 대결은 앞을 내다봐야

1963년 서울생. 서울대 미학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 박사 수료. 중앙대 겸임교수. 카이스트 겸직교수
1963년 서울생. 서울대 미학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 박사 수료. 중앙대 겸임교수. 카이스트 겸직교수

과거지향적 현정권 방향감각 상실, 미래 전망 잃었을 때 회상은 달콤

진보와 보수가 서로 치고받고 싸워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싸움은 그저 그 방법론을 둘러싼 갈등일 뿐, 문제는 그 갈등을 생산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다. 그 일을 하는 것을 '정치'라고 부른다. 전직 대통령의 호감도가 2%에 불과하고, 현직 대통령의 지지율이 20%대로 내려앉은 지금, 지난 7년 동안 보수정권의 국정 운영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사회로 급속히 발전해 왔다. 산업사회로의 이행은 박정희 정권을 통해 이루어졌고, 거기서 정보사회로의 이행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통해 이루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세운 '지식기반경제'란 우리 경제를 상품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는 수준으로 한 단계 끌어올려야 한다는 인식의 표현이었다. 그 뒤를 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타가 공인하는 인터넷 대통령이었다.

아직도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라 하면 '산업화 대 민주화'의 대립으로 바라보곤 한다. 하지만 산업화든, 민주화든 모두 과거의 일일 뿐이다. 문제는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뒤를 돌아보는 게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 쪽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김대중-노무현이 '민주화' 정권이자 동시에 '정보화' 정권, 한마디로 탈산업화, 혹은 산업화 이후 (post-industrial)의 정권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명박정부는 전 정권을 '민주화' 정권으로 바라보고, 그에 대한 안티테제로 삽 들고 홀연히 '산업화'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이제는 웃음거리로 전락한 747 공약을 생각해 보라. 사실 성장률 7%라는 것은 개발도상국에서나 가능한 수치다. 슬로건 자체가 경제를 바라보는 정권의 인식이 개발독재 시절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준다. 수십조의 세금만 날린 4대강 사업이나 자원외교는 그런 시대착오적 정책이 불러온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박근혜 정권은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며 등장했다. 적어도 선거 전략으로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원래 복지와 경제민주화는 상대 당의 의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선거 전략'이었을 뿐, 집권 후 '복지'나 '경제민주화'는 듣기 힘든 말이 되었다. 비대위를 내세운 '혁신'도 선거를 위한 쇼에 불과했다. 정권이 자신을 출범시킨 '의제'를 스스로 내버렸으니 당연히 방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결국 박근혜 정권은 유신 시절의 통치 방식으로 돌아갔다. '십상시'의 난이 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로써 떠나는 민심을 잡아놓는 방식도 3공 시절의 것이다. '종북몰이'로 국민을 둘로 갈라놓고, 그중 한쪽의 지지만 확실히 챙기면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은가. 이명박 정권이 경제를 산업화시대로 되돌렸다면, 박근혜 정권은 이렇게 정치적 상부 구조마저 개발독재시대로 되돌렸다.

가슴 아픈 것은 그것이 국민들의 심성에 일으킨 을씨년스러운 풍경이다. 하늘에는 삐라가 날고, 서북청년단이 부활했다. 국정원에서는 절대시계를 뿌리며 어린아이들에게 동료 시민을 감시하고 고발할 것을 요구했다. 이 선동적 분위기 속에 마침내 어린 학생이 폭발물 테러를 가하는 일이 벌어졌다. 젊은이들이 단식하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폭식투쟁을 하고, 희생자들을 '오뎅'으로 비하하는 일도 있었다. 이게 사람 사는 나라의 꼴인가?

이런 분위기는 당연히 문화적 무의식에도 반영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복고는 문화적 복고를 낳는 법. 최근에 빅히트를 친 영화들이 각각 '충'과 '효'를 내세운 작품이었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현재의 시점에서 미래의 전망을 잃었을 때, 허용된 유일한 시간은 과거뿐이다. 과거에 사는 것은 힘드나, 그것을 회상하는 것은 달콤할 수 있다. 하긴, 군대 시절도 가끔은 그립지 않던가. 요즘 대중문화에 유행하는 각종 복고 취향에는 이 '향수'의 정서가 깔려 있다.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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