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용진각 계곡을 따라 러셀을 해서 북벽 방향으로 나아갔다. 양쪽 사면에서 흘러내린 눈이 계곡으로 모두 모여서 눈밭이 깊고 쉽게 푹푹 빠졌다. 제일 앞에서 러셀을 하는 경우, 무릎에서 허리까지 눈에 파묻혔다. 그래서 길이 나있지 않은 신설에서는 앞에서 길을 내면서 가는 사람이 가장 힘들다. 앞서 가는 사람이 허리까지 잠기는 눈을 수영하듯 헤치고 길을 만들면 그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눈을 차차 다진다. 4, 5명 정도가 지나가고 나면 그 뒷사람들은 큰 무리 없이 따라올 정도의 길이 만들어진다.
한라산 국립공원 같은 경우 눈이 엄청나게 쌓여서 등산로가 흔적도 없이 깔려버리면 어느 한 팀이 러셀을 할 것이다. 그런데 처음 길을 낸 팀이 등산로를 벗어나서 길을 내놓으면(고의가 아니라 전혀 길이 보이지 않아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완전히 녹아서 원래의 등산로가 보이기 전까지는 한 명이 러셀을 해서 낸 길을 따라서 몇 백, 몇 천 명이 등산을 하는 때도 있다. 그만큼 러셀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계곡을 거슬러 길을 내고 장구목 쪽 계곡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얗고 넓은 설사면이 깎아지른 아찔한 경사를 이루며 우리를 반겼다. 여기서부터는 러셀이 한결 더 힘들었다. 허리를 넘기는 높이의 눈은 온몸으로 먼저 눌리고 무릎과 허벅지로 다시 한 번 다진 후 눈을 헤치면서 발을 뻗어야 전진할 수 있다. 발을 내딛고 밟아도 다음 걸음을 준비하는 동안 내 체중에 의해 눈이 다져지면서 다시 쑥 내려간다. 아주 부드럽고, 무릎까지 빠지는 모래사장을 발을 질질 끌면서 나아간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힘들겠는가.
익숙하지 않거나 체력이 부족한 사람은 몇 미터 전진도 하지 못하고 지쳐서 뻗어버린다. 그렇게 설사면을 거슬러 올라 드디어 장구목, 고상돈 케른(위치를 알려주기 위한 표시의 의미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에 도착했다. 넓게 펼쳐진 고원 지대 중간에 투박하게 돌로 쌓아놓은 케른이 눈에 띄었다. 반대편으로는 윗세오름 방향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도 멀리서 보였다. 고상돈 케른 바로 옆에 있는 삼각봉 정상까지 가서 경치를 둘러보았다. 멀리 바다도 보이고 백록담 쪽으로 맞은편 능선 위 왕관 바위에서 경치를 감상하는 등산객들도 눈에 띄었다. 다행히 날씨가 맑아서 경치는 좋았지만 하얀 설사면 위에 태양빛이 반사되면서 눈을 자극하고 강한 자외선도 반사시켜 선글라스를 착용해야만 했다. 경치를 감상한 후에 용진각 방향으로 뻗어 내려간 계곡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올라가는 것은 2시간이나 걸렸지만, 내려오는 데에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글리세이딩(미끄러져 내려오는 기술)을 해서 내려오는데 말이 글리세이딩이지 보이는 모습은 눈썰매 타기와 매한가지다.
그렇게 러셀 훈련을 한 후 설벽등반훈련을 준비했다. 조금 전에는 쉬운 길을 찾아서 갔지만 이번에는 정상에서 눈여겨본 가장 경사가 급하고, 마지막에 수직 구간까지 있는 설벽을 등반 루트로 정했다. 안전벨트와 헬멧을 착용하고 피켈과 크램폰, 로프, 스노바 등의 장비도 배낭에 챙겨 넣었다.
다시 용진각에서 고상돈 케른 쪽으로 향하는 능선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 훨씬 경사가 심한 사면이 나왔는데 햇볕을 받는 능선이라서 표면이 얼어붙어 크러스트를 형성한 사면이다. 겉은 눈인데 실제는 빙판과 같은 이런 곳에서 한 번 잘못 미끄러져서 제동을 못 하면 계곡 하단까지 봅슬레이와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 추락을 대비해 활낙정지를 염두에 두고 피켈을 잡고 진행한다. 혹시나 미끄러지면 피켈의 뾰족한 쪽을 바닥에 찍어서 제동한다. 그렇게 설벽구간을 진행하다가 비교적 완만한 곳에 도착해서 로프를 꺼낸다. 마지막 급경사 구간을 등반하기 위해서이다. 굵은 나무에 확보물을 설치하고, 선등자가 로프를 생명줄 삼아 등반을 한다. 눈이 많고 확보하기가 어려워서 여분의 피켈을 바닥에 깊이 박아넣고, 그것을 중간 확보물로 이용한다. 아까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때마침 거센 눈보라로 바뀌어 몰아친다. 이 정도로는 등반하는 데 문제는 없지만, 20m 앞의 등반자도 식별하기 어려운 시야는 신경이 쓰인다. 눈보라 치는 히말라야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래서 한라산에서 동계훈련을 하는구나!'라고 확신했다.
이제 등반자가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로프는 조금씩 꾸준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로프가 꾸준히 나가는 것으로 봐서는 잘 등반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와중에 무너져 내리는 불안한 설벽을 딛고, 정상에 다다른 선등자로부터의 무전이 들려왔다. "등반 완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농담을 주고받는다. "야, 그거 올라가는데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리냐, 한숨 자다가 올라갔냐?" "아, 예. 너무 졸려서요. 허허허." 재미없는 농담이지만 손발이 잘 맞아서 좋다. 그렇게 한라산에서, 또 하루의 고된 훈련이 끝나가고 있었다.
김재민(대구산악연맹 일반등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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