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꿈꾸는 인문학] 인문학의 빛깔은 다양하다

입력 2015-01-26 05:00:00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눈부셔 눈부셔서 알았습니다/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나희덕의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중에서)

인문학은 사람이 지닌 무늬를 그려냅니다.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화를 내고 있는지, 기뻐하고 있는지, 배가 고프지는 않은지, 외롭지는 않은지 물어봅니다. 사람이 그리는 무늬는 제각각입니다. 나는 웃고 있는데도 왜 울고 있느냐고 위로받기도 하고, 나는 지금 슬픈데도 뭐가 그리 좋으냐고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보이는 사람의 무늬를 받아들이는 보는 사람의 무늬가 이미 거기에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시는 사람의 무늬를 가장 진솔하게, 그리고 깊이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나희덕은 시를 참 잘 쓰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 판단도 내가 그리는 무늬로 그린 나희덕의 무늬입니다. 결국 나의 무늬인 셈이지요. 시인은 우연히 흰색과 분홍색이 어우러진 예쁜 꽃을 만나게 됩니다. 차라리 흰색이면 흰색, 분홍색이면 분홍색이지 두 색이 절묘하게 어울린 그 꽃에 오랫동안 시선을 떼지 못합니다. 흰색도 있고, 분홍색도 있고, 아니 흰색도 분홍색도 아닌 색도 있는 그 꽃에서 시인은 여러 겹의 마음을 지닌 사람의 무늬를 봅니다. 그것을 관계라는 용어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사람의 무늬를 알아가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보이는 사람의 무늬는 단지 나에게만 보이는 그 사람의 무늬에 불과합니다.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도 나를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것은 아마 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보이는 무늬와 내가 나를 보는 무늬,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무늬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보이는 무늬도 다릅니다. 어느 것이 본질이라고 확정하기는 쉽지 않을뿐더러 무의미한 일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그 나무에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복숭아나무라고. 그리고 피우고 싶은 꽃빛이 아주 많은 그 나무가 무척 외로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상의 외로움을 인식하면 나의 마음도 열립니다. 내 마음은 대상에게 다가갑니다. 대상이 지닌 여러 겹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오래 걸렸다는 말은 최소한 마음의 가장자리에는 다가갔다는 의미겠지요. 하지만 이 시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꽃이 떨어진 후에 나무에는 열매가 열렸습니다. 그 열매는 복숭아가 아니라 매실이었습니다. 결국 시인이 오랜 시간을 두고 여러 겹의 마음을 읽은 그 나무는 매실나무였던 셈입니다.

그것이 삶입니다. 그런 삶의 무늬를 다루는 것이 인문학이고요. 그래서 어쩌면 인문학에 대한 우리의 탐색은 실패로 끝날지도 모릅니다. 복숭아나무라고 생각한 인문학이 실제로 매실나무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 과정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어내려고 한 시인의 행위 그 자체가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시인이 그러한 행위를 시로 만들어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찾아가는 인문학의 무늬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인문학에 가까운 행위입니다. 인문학은 정답을 찾는 학문이 아닙니다. 무늬를 확정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질문을 만들고 질문에 대한 다양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 과정이 그리는 무늬를 찾아가는 걸음입니다. 결국 그것이 우리 삶이니까요.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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