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낙서를 하는가
지금까지 낙서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도 알아봤고, 낙서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취재를 통해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를 가지고 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낙서를 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 동기는 잘 생각해보면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벽이나 종이에 연필로 뭔가를 그리고 있으면 어른들로부터 "왜 깨끗한 벽에 낙서를 하고 난리냐"며 야단맞기 일쑤였고, 교과서는 항상 깨끗하게 써야 하며 뭔가 지저분하면 선생님들이 "교과서가 왜 이 모양이냐"며 머리를 쥐어박곤 했다. 어른이 되니 식당이나 카페의 낙서는 그런대로 참고 봐준다지만 유적지에 쓰인 낙서를 보면 "도대체 여기에 낙서한 인간들은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기에…"라며 혀를 차게 마련이다. 결국 낙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진 가장 큰 계기는 결국 "물건을 깨끗이 써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낙서하지 말라"고 그렇게 오랫동안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볼펜이나 사인펜, 매직펜, 심지어는 칼과 스프레이 페인트 등을 이용한 낙서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람들은 왜 낙서를 하는 것일까. 매일신문 취재진은 그 오묘하고 희한한 심리를 추적해 나름의 가설을 세워 봤다. 해당 가설의 이름은 기자가 임의로 붙여본 것이다.
◆사회 반항설
한 그래피티 아티스트를 만나 질문을 던져봤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저 같은 경우는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세상에 대해 제가 가지고 있는 불만을 어디에다가는 이야기해야겠는데, 공간도 안 보이고, 괜히 제 얼굴과 이름을 걸고 이야기하면 위험하다는 생각도 드는 거죠. 그렇다 보니 내가 세상에 대해 갑갑하게 느끼는 부분을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제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방법으로 그래피티를 선택하게 된 겁니다."
이는 최근 대구 도심에 나타난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Papa Chicken'이라고 희화화해 그린 그림과 서울 명동 거리에 'ㅈㅂㅇㄱㅎㅎ나라꼴이엉망이다'라는 낙서가 등장하면서 주목받는 설이다. 예전부터 사회에 불만이 많은 세력들이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잘 볼 수 있는 곳에 이런저런 낙서를 해 놓는 경우가 많았다. 이성엽(31) 씨는 "2012년 대선 전후로 서울에 갈 일이 있었는데 서울역 화장실 문에 안철수 의원에 대한 욕을 한 바닥 써 놓은 낙서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심리와 상통하는 것이 인터넷 댓글이나 익명게시판이다. 내가 쉽게 드러나지도 않거니와 아이디나 별명 뒤에 숨어 마음껏 세상에 대한 비판과 조롱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댓글란이나 익명게시판은 디지털 시대의 공인된 낙서장이 되고 있다.
◆좌'우뇌 균형 추구설
하지만 사회 반항설은 "아무도 안 보는 빈 종이에 쓸데없이 끄적거리는 것도 사회 반항이냐", 또는 "미취학 아동이나 초등학생들이 벽에다가 저지레하는 것도 사회에 대한 반항인 것인가"라는 반론에 의해 탄핵받는다. 이때 들이밀 수 있는 것이 바로 좌'우뇌 균형 추구설이다.
예를 들어 전화를 받을 때 옆에 펜과 메모지가 있으면 딱히 적을 내용이 있지 않음에도 펜을 들어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을 것이다. 심지어 메모를 하고 전화번호를 적어놓은 뒤에 나중에 살펴보면 전화번호에 의미 없이 동그라미를 쳐 놓거나 8이나 0과 같이 공간이 있는 숫자에 까만 칠이 칠해져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전화 내용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우리는 무의식 중에 멀티태스킹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심리학자나 미술치료 등을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뇌가 정신의 균형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언어나 인지 능력 등을 관장하는 좌뇌를 계속 쓰다 보면 뇌는 형평을 맞추기 위해 좌뇌를 쉬게 하고 우뇌를 쓰게 하려는 본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백중열 교수(대구교대 미술교육과)는 "우뇌가 발달한 아이들은 자신이 학습한 것을 글자로 풀어내기보다는 그림으로 풀어내는 걸 더 잘하는데, 우리나라 교육은 이런 아이들의 방식을 '쓸데없이 낙서한다'라고 본다"며 "최근 유행하는 '컬러링 북'도 색칠을 통해 좌뇌를 쉬게 하고 우뇌를 활성화시키는 방식으로 스트레스와 힐링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 욕구 표출설
'좌'우뇌 균형 추구설'도 맹점은 있다. "그러면 카페나 분식집에 글자로 낙서하는 애들, 옛날 담벼락에 분필로 '누구와 누구는 사귄다더라'고 낙서하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다. 그리고 '좌'우뇌 균형 추구설'도 그림으로 낙서하는 경우에는 해당되지만 글자로 낙서하는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데 좌'우뇌 균형 추구설과 사회 반항설도 깊게 들어가면 한 지점에서 만난다. 결국 사람들은 내 안에 있는 뭔가 소통하고 싶은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낙서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사회 반항설이 주장하는 내용도 결국에는 세상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고 싶어서' 낙서를 선택한다는 내용이고, 좌'우뇌 균형 추구설도 따지고 보면 '좌뇌와 우뇌의 불균형을 해결하고 표현하기 위해' 낙서를 한다는 말이다. 정운선 교수(경북대 소아정신과)는 "누군가가 볼 수 있는 곳에 낙서한다는 것은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다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라며 "이 부분에서 낙서는 표현 욕구와 의사전달 욕구를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고 말했다.
백중열 교수는 "아이들 중 스트레스가 많은 아이들이 낙서를 많이 하는 경우가 많다"며 "스트레스의 정도나 현재 아이의 정신상태, 그리고 좌뇌와 우뇌의 발달 정도도 낙서로 확인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특히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하는 낙서는 자신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말들을 적었다가 지우면서 스스로 스트레스를 푸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화장실벽과 같은 공공장소에 낙서하는 경우도 따지고 보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은밀하고 독립적인 공간에 배설함으로써 평소에 억눌려 있던 표현 욕구를 풀어낸다고 볼 수 있다.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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