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서 언론탄압 쿠르드 기자 숨겨왔던 '할릴 테멘' 스토리
한국전에서 싸웠던 쿠르드 용사 '할릴 테멘'은 2012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비록 필자는 테멘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를 만나서 인터뷰한 사람이 있다. 바로 용감한 쿠르드 기자다. 그의 이름이나 신상은 지면에서 밝힐 수 없다. 쿠르드 기자는 할릴 테멘이 작고하기 5년 전에 그를 인터뷰했지만, 언론에 대한 탄압이 야만적인 터키에서 이 같은 기사를 출판한다는 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라 적당한 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쿠르드 기자는 테멘에 관한 기사와 사진들을 7년이나 깊이 숨겨뒀다가 필자를 만난 뒤에 사진과 기사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코바니를 절반 이상 차지한 이슬람국가단(ISIL)에 맞서 열악하게 무장했음에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쿠르드민병대의 저항정신은 전 세계인들의 격찬을 받아왔다. 미국의 공습지원을 받으면서 쿠르드전사들은 이슬람국가단을 조금씩 밀어내왔고 지금은 75%의 코바니땅을 수복했다고 코바니의 전투 지휘부가 필자에게 전해주었다. 쿠르드인들의 끈질긴 저항정신은 수천 년 동안 다져지고 단련돼 온, 민족의 체화된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중세시대 때 십자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탈환해 명성을 떨쳤던 쿠르드출신의 맹장 '살라하딘'은 지금도 쿠르드 용사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회자되고 있다.
쿠르드족 출신의 한국전 참전 용사 할릴 테멘에 따르면 그가 자라서 용감한 전사의 상징이었던 살라하딘을 본받기를 원했던 그의 어머니는 그가 터키군에 입대하기를 권유했다. "남자가 되려면 군에 가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면서 자랐던 테멘은 18세가 되자 터키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용감한 살라하딘의 후예가 되려고 한국전에도 자발적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1952년에 이즈미르(터키의 두 번째 대도시)의 군부대로 자진해서 입대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터키말을 배워 터키군에 입대했어도 언어에서는 큰 문제는 없었다. 군부대에서 훈련을 받던 중 터키장교 한 명이 훈련병들에게 한국전에 참가하기를 권유하는 연설을 했고, 연설에 강한 감동을 받은 테멘은 즉석에서 한국전에 참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훈련부대에서 쿠르드 병사로서는 일 순위로 자원해서 한국전에 간다는 서약을 했다. 그의 자원서약은 다른 쿠르드 병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가 한국전에 참전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자 75명의 쿠르드 병사들이 그를 따라 손을 들었다는 것이다. "쿠르드인들은 용감하고 싸우는 방법을 잘 알지만, 터키인들은 잘 모른다"라는 연설을 하면서 동료 쿠르드 병사들의 한국적 참전을 권유했다고 한다. 참전하기로 서약한 뒤부터 4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모두 5천500명의 병사가 한국전에 참전하려고 함께 훈련을 받았고, 곧 한국으로 보내졌다고 회상했다.
"이때가 1953년이었는데 대부분 병사는 쿠르드인들이었다. 다른 쿠르드 병사들의 참전 동기는 잘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한국전에 참전해 싸우는 이유가 명백했다. 쿠르드민족과 종교, 그리고 영예를 위해서였다."
한국으로 가는 여행길은 멀었다. 3천500명의 병사를 실은 배가 이집트의 수에즈운하를 지나 한국으로 향했는데, 수에즈에서 한국으로 향하던 1천 명의 캐나다 군인들이 올라와서 함께 여행했다. 거의 25일 동안 육지는 전혀 보지 못하고 계속 여행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가는 도중 바다 한가운데서 터키로 돌아가는 군인들을 실은 배를 만나 배가 잠시 멈춰 섰는데, 이때 바다를 사이에 두고 돌아가는 쿠르드 병사들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돌아가던 병사들이 하는 말은 엄청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너희들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알긴 알고 가나? 너희들은 지금 죽으러 간다. 우린 운이 좋아 살아있지만…." 이들은 우리를 향해 "한국으로 가지 말고 되돌아가자!"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렇다고 배의 항로를 되돌릴 수도 없었고 다른 배로 갈아탈 수도 없었다.
마침내 길고 긴 항해 끝에 파김치가 된 병사들은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내리자마자 훈련이 시작됐다. 훈련 중에 다섯 명의 쿠르드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에는 신무기였던 미국산 대포를 쏘는 훈련을 하던 중 오발로 말미암은 사고로 다섯 명의 쿠르드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하지만 이들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조차도 없었다. 이들이 죽은 뒤 훈련은 더 엄해졌고 훈련이 끝나자마자 바로 미군 군복과 무기를 지급받고 전투지로 보내졌다.
전투는 그의 상상을 넘을 정도로 격렬했다고 기억했다. "우리는 중국군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는데 중국 군인들은 총도 없이 우리를 향해 몰려왔다. 중국 병사들을 향해 계속 사격을 했고 이들은 우리 눈앞에서 쓰러져갔지만, 이들의 숫자는 줄어든 게 아니라 계속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다. 전투를 하는 도중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손에서 총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15일 밤낮으로 전투했고 한 달 후에야 전투가 끝났다. 그 뒤 두 주 동안은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휴전이 시작됐고 한 달 후에 다시 3개월의 휴전이 이어졌다. 내가 기억하기에는 나와 함께 갔던 5천500명의 병사 중 많은 병사가 사망하고 4천800명의 병사만 돌아왔다고 기억한다."
당시 테멘의 부대가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획득한 전과는 다른 군대들의 칭송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당시 미군들은 우리 터키 병사(사실은 쿠르드 병사들)들을 '영웅적인 병사들'이라고 칭하면서 치켜세웠고, 터키 군인들까지도 '동부지역 사람들'(쿠르드 사람들)은 용감하다면서 우리 쿠르드 병사들을 칭찬했다."
테멘의 기억으로는 "한국전에서 지급된 무기나 용품들은 모두 미군들이 지급한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한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1년을 더 주둔했고 총 14개월을 한국에서 보낸 뒤 돌아왔다.
한국에 대한 기억으로는 무엇이 남아있는가를 물었다. "당시 한국은 춥고 습도가 높아 우리 쿠르드인들이 생활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인상 깊었던 모습은 장사하는 한국 사람들이 터키말을 배워 터키말로 장사하는 모습을 보고서 아주 놀랐다"고 테멘은 회상했다. 그리고 테멘의 기억으로 한국은 너무 가난했다. 당시 가난했던 쿠르드 병사들까지도 한국인들에 비해 부자라고 느꼈을 정도로 한국은 가난했다고 한다.
2005년도에 참전용사로 한국에 초청을 받아 한국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 봤던 한국은 너무 부유했고 마치 낙원처럼 발전해있어서 가슴이 뭉클했다. 그렇게 가난했던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변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당시 나의 마음속에 들었던 생각은 우리 쿠르드 용사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할릴 테멘은 2012년 2월 4일에 '알리고르'에서 사망했다.
하영식 객원기자(국제분쟁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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