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아픔 고난의 극복 새로운 희망…매일신문 속 현대사

입력 2014-12-31 07:33:42

1946년 창간한 매일신문은 대한민국과 대구경북의 현대사를 지켜보고 감시하고 비판한 증인으로 꿋꿋이 자리를 지켜왔다. 매일 오후 인쇄기를 빠져나와 신문지 냄새를 풍기며 독자들에게 배달된 지면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기쁨, 고난의 극복과 도약, 희망을 생생히 전달해왔다. 매일신문은 68년의 시간을 지나며 21666호의 지령을 아로새긴 채 오늘 자로 석간 시대를 아쉽게 마감한다. 2015년 1월 1일부터 새롭게 조간으로 독자들을 찾아가는 전환점에서 고색창연하고 살아 숨쉬는 현대사의 10장면을 짚어보고 더 나은 지면을 만들 것을 다짐해 본다.

◆1955…전쟁의 상흔과 궁핍

1950년대는 1960년대 이후까지 이어진 궁핍의 시대였다. 1950년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남긴 상처와 후유증은 넓고 깊었다. 가족을 잃은 아픔과 상처, 앞날에 대한 암울함, 그리고 당장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은 삶을 살아내야 했고 목숨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춘궁기인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들도 있었다.

1955년 매일신문의 지면에는 동생을 업은 어린이가 대구 대신동의 한 판자촌 골목에서 국수를 사 먹고 있는 사진이 실렸다. 전쟁 직후의 헐벗고 남루한 시대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해 4월 20일 자 신문에는 춘궁기를 맞아 식량이 떨어진 주민들에게 양곡을 대여해 위기를 넘기겠다는 경북도의 방침을 전했다.

◆1960…3·15 부정선거와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부는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기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유령 유권자 조작, 4할 사전투표 등 부정 선거를 저질러 국민의 저항에 직면했다. 이에 앞서 정부가 야당 후보의 선거 유세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학생들에게 '일요 등교' 지침을 내리자 대구의 8개 고교 학생들이 2월 28일 시위에 나섰다. 대구 2'28민주운동은 독재 정권의 종언을 고하는 시발점이 되어 3'15 부정선거가 드러나자 4'19혁명의 활화산으로 연결되었다. 결국 이 대통령은 하야, 미국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고 자유당 정부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매일신문은 민주 혁명의 증언자가 되어 이해 4월 13일 자 지면을 통해 민의원에서 '이 대통령 즉시 하야'를 결의한 사실을 보도했고 8일 뒤 데모대가 대구시 중구 자유당 경북도당으로 몰려가 간판을 끌어내리는 모습을 알렸다.

◆1964…끈끈한 한·미 관계

강대국 미국은 한국 현대사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국가이다. 8'15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남한에서 군정을 실시했고 6'25전쟁에 UN 16개국의 일원으로 참전,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이후 국가 경제가 미약한 한국을 원조, 성장을 지원했고 한국에 군대를 주둔, 안보에도 도움을 주면서 지금까지 밀월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매일신문은 1964년 11월 8일 대구 미 8군 부대가 주최한 노인 경로잔치에서 미군이 갓 쓰고 한복 입은 노인에게 당구 치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진을 게재했다. 지금 보면 무척 이채로운 모습이다. 10여 일 후 미국 정부가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 기한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기사도 보도됐다.

◆1970…경부고속도로 개통

정부는 1960년대부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한 산업화와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내걸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이를 상징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무리하다거나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강하게 밀어붙여 결실을 맺었다. 당시 매일신문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경부고속도로의 위용과 개통 소식을 전했다.

◆1971…부정 혼탁 막걸리 선거

역대 국회의원 선거는 오랜 기간 부정과 혼탁으로 얼룩졌다. 1971년 5월 25일에 실시한 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막걸리 선거'라는 말이 유행했다. 후보자들이 유권자들에게 선심성 관광 나들이를 제공하고 술과 향응 등을 제공했다. 후보자들이 향응을 제공해 표심을 자극하는 행태도 문제였고 유권자들 역시 선거 때면 제공되는 향응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이러한 부정선거 관행은 상당 기간 이어졌다. 당시 매일신문은 유원지에서 막걸리에 취해 쓰러진 여인의 사진과 어린이마저 휩쓸려 막걸리를 마시는 기사를 통해 당시 현실을 꼬집었다.

◆1979…유신 독재의 종언 고한 10·26 사태

1979년 10월 26일 밤 서울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아 서거했다.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일군 지도자이자 한편으로 독재 통치를 일삼던 박 대통령의 죽음으로 유신시대가 종언을 고했다. 당시 이 충격적인 뉴스는 매일신문 1면을 비롯해 여러 지면에 걸쳐 다뤄졌으며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국민의 충격과 슬픔도 매우 컸다. 특히 박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 구미시 상모동 주민들은 매우 비통해했다. 국장 기간에 상모동 주민들이 분향하는 모습을 카메라 렌즈에 담아냈다.

◆1987…6월 민주 항쟁

전두환 정권이 임기를 다할 무렵 대통령 간선제를 근간으로 하는 기존 헌법을 지킬 것을 천명하자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대구, 서울 등 전국에서 일제히 일어났다. 신군부 출신의 정권이 연장을 획책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6월 민주 항쟁의 불길이 도처에서 타올라 시위대가 '호헌철폐'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충돌하는 등 격렬한 저항이 이어졌다. 민주 항쟁은 6'29선언을 이끌어냈고 이후 정부 문민화의 초석이 됐다.

매일신문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현장을 많은 기사와 사진을 통해 전달했다.

◆1998…IMF 외환 위기(1998년 1월 10일)

1997년 말 터진 IMF 외환 위기는 미증유의 충격이었다. 기업 통폐합과 기업체의 구조조정으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서민들이 부지기수였고 중상층 이상의 생활수준을 누리다가 사업이 망해 한순간에 몰락한 이들도 넘쳐났다. 그러나 국가 위기를 한마음으로 뭉쳐 이겨내자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금모으기 운동'이었다.

매일신문은 금모으기 열기를 사진으로, 기사로 보도했다. 특히 금을 모아 국가 부채를 갚자는 제안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지역에서 나왔으며 대구시민들의 참여가 높아 주도적으로 운동의 흐름을 이끌고 있다는 점을 짚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인 대구가 외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도 앞장서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2003…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서 화재가 발생,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참사는 지적장애를 가진 50대 남자가 석유가 든 페트병에 불을 붙여 발생했다. 화재 당시 지하철 내부 모습을 카메라로 찍은 승객이 사진을 본사에 제공, 지면에 실렸고 이 사진은 외신들이 인용해 세계적 특종이 됐다. 이 대형 참사는 대구 사회는 물론 국내에 깊은 충격과 후유증을 남겼다. 매일신문은 참사 이후 지속적인 보도를 통해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지하철 화재 참사는 사고와 재난의 비극의 연결고리를 끊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웠다. 이에 앞서 1994년 서울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5년 대구 상인동 지하철 공사현장 폭발사고와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이 있었고, 올해는 세월호가 침몰해 안산 단원고 학생 등 300여 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압축 성장의 폐해가 불러온 부실, 과욕 등이 원인이었다.

◆2011…국제화 향한 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2011년 8월 27일 대구스타디움에서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화려한 막을 올렸다.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로 우사인 볼트, 옐레나 이신바예바 등 세계 정상급 육상 스타들이 참가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대구는 국제화 시대를 맞아 2000년대 이후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도시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방화의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가 2003년 유니버시아드대회 개최에 이어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최로 이어졌다. 대회는 성공적으로 치러져 대구 시민들에게 자신감을 안겨줬다. 대회 개최 이후 성과를 이어나가고 다른 분야에서도 활력을 불어넣는 일은 현재진행형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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