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3월1일 역사가 시작됐다
역사와 전통의 대구경북 1등 언론 매일신문이 석간을 버리고 과감하게 조간시장으로 뛰어들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53년) 동안 오후에 보는 신문으로 달려오다, 이제는 새벽에 발행해 아침에 보는 신문이 됐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정론직필의 언론가치를 지켜온 매일신문은 불의에 저항하고, 역사의 현장에서 국민과 함께했다. 이젠 전국 일간지와 경쟁하며, 지역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자 조간 전환을 선언했다. 대구경북의 자랑스러운 정론지 매일신문은 지난 68년 영욕(榮辱)의 세월을 뒤안길로 보내고자 한다. 2015년 새해 첫날, '굿모닝! 매일신문'으로 조간신문으로서의 새 발걸음을 뗀다.
#1. 1960년 남선경제신문→매일신문 '재탄생'
이름에는 그 대상이 지향하는 가치관이 깃들어 있다. '매일신문'은 1960년 7월 7일에 처음 지어졌다. 독재 타도를 부르짖는 학생들이 대구 시내로 뛰쳐나온 '2'28 학생의거'부터 '4'19 혁명' 등 민주화 운동이 숨 가쁘게 이어지던 해였다.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이 끝났을 땐 국민의 억눌렸던 열망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그 해 매일신문은 대구경북은 물론 전국에서 불어오는 민주화 바람을 지면에 담아내야 했다. '대구'라는 지역명을 떼어내고 '매일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 배경이다.
1946년 3월 1일 창간된 매일신문의 첫 이름은 '남선(南鮮)경제신문'이다. 해방 후 닥친 식량난으로 경제부흥이 시급하던 때였다. 당시 매일신문은 '경제해방'을 외치며 경제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2. 1951년 9월엔 아침 저녁 두 번 발행하기도
"신문이요." 1946년 3월 1일 저녁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손에 들린 것은 매일신문 창간호 '남선경제신문'. 지금 신문의 절반 크기만한 타블로이드판 2개 면이었다. 당시 남선경제신문은 치솟는 물가와 부족한 쌀로 곤궁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 미군정에 일침을 가했다.
물론 가혹했던 경제난은 언론사도 비켜갈 수 없었다. 급여 지급이 미뤄지는 등 자금난으로 '휴간'(休刊)이라는 뼈아픈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부조리한 권력에 칼을 들이대고, 지역민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그 결실은 1951년 9월 아침'저녁 하루 두 번 신문 발행이라는 조석간 병행제로 나타났다. 타블로이드판 하루 한 번 발행으로는 많은 양의 기사를 소화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내 이 노력 역시 빠듯한 살림살이로 물거품이 됐다. 하루 한 번 배대판(현 신문 크기) 제작이라는 대안으로 대체됐다. 대신 더욱 알차고 짜임새 있는 신문으로 탈바꿈했다.
#3. 대구경북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 1위 '굳건'
매일신문은 '가장 영향력 있는 지역매체'를 묻는 질문에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10년 전 미디어리서치 조사 때(1위 매일신문 61%, 2위 언론기관 39%)부터 수년 전까지 전문 조사기관의 설문 때마다 1위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2, 3위인 지역 방송국과 타 일간지와도 20% 안팎의 큰 격차를 둔 1위라 명실상부 지역의 대표 언론사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역민들에게 매일신문을 구독하는 이유를 묻는 설문조사에서는 ▷다양한 지역정보 제공 및 이슈'여론 선점(79.9%) ▷신속'정확한 뉴스(9.8%) ▷정부시책 견인 역할(4.9%) ▷수준 높은 보도기사와 논평(4.1%) ▷기타(1.2%) 등으로 의견이 나타났다.
또 매일신문은 매년 대구경북 신년교례회(재경 신년교례회는 서울에서 개최)를 비롯해 어린이 큰잔치, 늘푸름 환경대상, 매일보훈대상, 매일서예대전, 매일신춘문예, 서상돈상 등 지역의 굵직한 문화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4. "독자들 생활리듬 맞춰" 53년 만에 석간 옷 벗어
매일신문의 독자를 향한 발걸음은 계속됐다. 1954년 7월부터 매주 토요일 조석간 발행제를 시도한 것. 그러나 이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비용 등의 문제로 주말 4면 배대판으로 바뀌게 된다. 확대된 주말판에는 문화예술분야 기사를 집중적으로 실어 독자들의 문화적 갈등을 적극 해소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사세 확장과 함께 보폭을 조금씩 넓혀나갔다. 1957년 완전석간제 4면 발행에 이어 1959년 3월에는 조간 2면, 석간 4면으로 확장했다. 확장 발행을 위한 고속윤전기도 구입했다. 이러한 발행체제는 1962년 정부의 언론정책에 따라 단간제(석간 8면)로 전환될 때까지 지속됐다. 이후에는 석간 발행체제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증면을 통해 독자와의 만남을 넓혀갔다.
그리고 2015년 1월 1일. 매일신문은 53년 만에 석간이라는 오랜 옷을 벗고 '조간화'라는 대변혁을 시도한다. 독자들의 바뀐 생활리듬에 맞춰 정보를 보다 빨리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5. 발로 뛰는 每日! '가짜 이강석 사건' 등 특종보도
매일신문의 68년사는 수난(受難)과 투쟁(鬪爭)의 역사였다. 최석채 주필의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 때문에 무장 괴한들이 들이닥쳐 인쇄'통신장비 등 공무국 시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적도 있다.
1957년 9월 18일 매일신문은 기막힌 특종으로 자유당의 치부를 폭로했다. 이른바 '가짜 이강석 사건'이다. 검찰출입 초년 기자가 낚아올린 이 특종기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강석 행세를 하며 6개 도시의 고관대작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범인 강성병을 세상에 알린 보도였다. 1960년 2월 29일에는 대구의 2'28 학생의거를 사진과 함께 머리기사로 올리며 학생들의 요구가 정당함을 역설했다.
▷경산 코발트광산 양민학살사건(이종태 기자) ▷우루과이 라운드 10년 우리 농업 어디로 가고 있나(정인열 기자) ▷고추군납비리(김경돈'권동순'엄재진 기자)는 한국기자상 취재 및 기획부문에서 수상했으며, 주간매일 생활정보팀도 신문편집 부문에서 한국기자상을 거머쥐었다.
기획취재팀 권성훈 기자 cdrom@msnet.co.kr 신선화 기자 freshgir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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