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도 시곗바늘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사람들도 달력에서 딱 그만큼의 숫자를 지우며 살았다. 그렇게 뒷걸음치듯 밀려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되돌아본다'는 것은 사실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비록 남은 것이 박제된 추억이거나 역사라는 이름의 흔적뿐이더라도 지난 모든 것은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자 삶의 생생한 기록지다.
최근 전국의 교수 700여 명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지록위마'(指鹿爲馬)를 뽑았다. 먼지 앉은 고전에서 지금 시류와 의미가 통하는 글을 뽑는 이런 행위 또한 시간을 의식한 일이다. 그 뜻이 무엇이든 이런 유식한 문자보다 보통사람들에게는 올 한 해가 슬프고, 불편하고 어려운 시간이었다는 표현이 더 가슴에 와 닿을 듯 싶다.
울돌목에 잠겨버린 세월호의 비극은 우리의 가슴을 철저히 후벼 팠다. 300명이 넘는 아까운 목숨을 잃고도 손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한 무능한 정부를 사람들은 욕했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탐욕스런 자들과 부패한 관리들, 제 몫 챙기기에 바쁜 관피아를 향해 끓어 넘치는 분노를 쏟아냈다. 잔인하고 참혹했던 4월의 이야기다. 하지만 시간은 인간의 목소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겠다는 공허한 외침만 남았을 뿐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세월호의 실종자처럼 '김영란법'은 여전히 실종 상태다.
살아남은 자들의 삶은 계속 곤두박질 쳤다. 팍팍한 살림살이와 '미생'(未生)의 시간 앞에 사람들은 절망했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또 열심히 살고 싶어도 결코 살아지지 않을 것 같은 시대를 원망하고 울고 분노했다. 모두가 완생을 꿈꾸지만 세상은 그 작은 빈틈도 열어주지 않았다. 대신 철모르는 땅콩 때문에 가진 자의 서슬 퍼런 훈계 앞에 가지지 못한 자들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권력 주변에서 벌어진 다툼이 한낱 찌라시로 돌변하는 순간 민심은 권력의 불통에 등을 돌렸다. 국민은 더 이상 권력의 주인이 아니라 저질 막장드라마를 지켜보고도 제대로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하는 관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종북이라는 낙인이 찍힌 통합진보당은 70만 쪽의 기록과 347쪽의 결정문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념적 치매를 진보로 포장해온 세력의 종말인지, 위태로운 권력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보수의 비열한 역습인지는 역사가 평가할 일이다. 그러나 한 이념 정당의 종말을 결정 짓는 최종 주체는 헌법재판소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60%가 넘는 이 땅의 사람들이 통진당에서 진보라는 가면과 종북의 그림자를 보았다면 진보는 지나온 과정을 낱낱이 돌이켜보고 반성하며 다시 출발점에 서야 한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시 '우리들의 시간'에서 노래했다. '목에 힘주다 보면/문틀에 머리 부딪혀 혹이 생긴다/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우리는 죄가 많다/뽐내어본들 도로무익(徒勞無益)/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그저께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회 개혁을 강조하며 행한 연설 중 한 대목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일부 관리들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존재보다 우월하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갑(甲)이 활개를 치고 미생의 뼈저린 차별이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지금 우리 사회에 던지는 날카로운 바늘과 같은 말씀이다.
시간과 삶은 같은 말은 아니지만 동의어다. 쏜살보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의 등에 얹힌 우리의 인생은 시간의 눈치를 살피며 시간이 허락한 방식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 앞에 모두가 겸손한 자세로, 주어진 시간 안에서 최대한 바른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한다. 시간이 때로는 우리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지만 이 또한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오늘은 성탄절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어떤 자세로 시간을 대하고 삶을 생각하며 사람을 보아야 하는지 고민이 깊어지는 날이다. 올해도 이제 고작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닳기는 해도 없어지지 않는 시간 앞에 우리가 좀 더 솔직해질 수는 없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새해에는 위로와 용기, 희망과 감동의 시간만이 우리 앞에 주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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