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通] 대구에 온 영화감독 이준익 씨

입력 2014-12-13 07:00:00

"주류에 순응하지 않은 나의 삶…의심의 화두 놓치지 않으려 했죠"

"아까 사진 많이 찍었잖아요. 또 찍어요?" 이준익 영화감독은 이렇게 말하면서 카메라를 들이대자 활짝 웃었다. 이달 5일 '대구콘텐츠코리아랩'의 초청으로 강연차 대구에 온 이 감독이 대기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성공 말고 행복을 설계하세요!" 이달 5일 계명대 성서캠퍼스에서 '관찰: 현실과 상상 사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이준익 영화감독이 청중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아니,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불금'인데? 다 나보러 온 거에요?"

이준익 영화감독이 기자에게 먼저 물었다. "예. 다 감독님 보러 온 사람들인데요." 맞다. 이 감독의 강연을 들은 사람만 250여 명. 그를 만나기 위해 한 달 전 예약했거나 당일 찾아온 사람들이다. 이 감독을 만난 것은 이달 5일 금요일 저녁이었다. 다양한 강사를 불러 상상력을 자극하는 강연을 무료로 기획하는 '대구콘텐츠코리아랩'이 이 감독을 대구로 초청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사가 이야기하고 앉은 사람들은 듣는 강연을 거부했다. "나는 강사 혼자 말하는 TED 이런 거 제일 싫어해요. 내 강연 이제 끝! 이제부터 질문하세요. 질문하고 토론하자고요." 이렇게 이 감독과 인터뷰가 시작됐다.

◆이준익 영화에 있는 것, 의심의 화두

이 감독이 놀랄만했다. 오후 5시 계명대 성서캠퍼스의 한 강의실에는 수백 명이 빽빽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강연 주제는 '관찰: 현실과 상상 사이'. 그 간극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했던 것일까. 불타는 금요일을 보내야 할 20, 30대 청춘들이 대부분이다. 이 감독이 무대로 올라가기 전 대기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지난달 영화감독 16명과 함께 '데뷔의 순간'이라는 책을 냈다. 오랜 시간 불안과 싸웠던 영화감독들의 청춘을 기록한 책이다. 책에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가 기억났다. 중3이었던 이준익이 전교생 졸업앨범을 다 촬영한 이야기였다.

"내가 중3 때 학교에서 졸업앨범 비리가 터졌고 졸업앨범을 아예 없애버렸어요. 그래서 내가 부자 친구한테 카메라를 빌려서 우리 반 애들 사진만 다 찍었어요. 진짜 졸업앨범처럼 운동장에 세 줄로 맞춰서 찍었는데 교감 선생님이 부르시더니 15반 전체 졸업사진을 저보고 다 찍으라고 하시더라고요. 한 장씩 인화해서 100원에 팔고 돈 좀 벌었어요. 그 돈으로 신발도 사고, 영화도 보고 했지. 하하."

이렇듯 그는 주류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류에 순응하며 살면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스미스의 졸개가 된다면서 청중들에게 겁을 주기도 했다. 이날 무대에 올라서서 가장 먼저 한 말도 "의심의 화두를 끊임없이 던지라"는 것이었다. 역사 코미디 영화인 '황산벌'(2003)은 경상도에 대한 의구심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부모님이 대구경북 출신인 이 감독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에 항상 의구심을 갖고 살았다. "의심하다 보니까 1천300년 전으로 간 거에요. 신라 김유신 장군, 백제 의자왕이 살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갔고 '그래, 여기서부터 풀어보자!' 생각한 거죠." 아직 개봉 전인 영화 '사도'도 "왜 영조는 자기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였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버릇, 이것은 저널리스트의 특징이다. 영화를 제작하기 전 현장을 찾는 버릇도 저널리스트를 닮았다. 그는 '아나키스트'(2000)를 제작하기 전 영화의 배경인 중국 상하이에 직접 갔고, '간첩 리철진'(1999)을 기획할 땐 간첩이 나왔다는 섬을 찾아갔다. 황산벌을 기획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획이 떠오르면 현장에 간다"는 이 감독은 영화 공동기획자와 함께 충남으로 갔다가 동네 사람들도 모르는 황산벌을 찾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책이나 상상, 컴퓨터 앞에서 추측한 것은 오류투성이에요. 상상의 실마리가 되는 것도 현장이고, 현장이 주는 영감이 있어요. 현장이 리얼리티를 강화하는 겁니다."

◆소수자를 비추는 감독의 카메라

인기 많은 이 감독 때문에 강연은 예정보다 약간 늦게 끝났고, 인터뷰 시간이 모자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터뷰할 시간이 없겠는데." 기자에게 가장 무서운 말이다. "감독님! 제가 동대구역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인터뷰를 하려면 운전기사라도 해야 했다. 계명대 성서캠퍼스에서 동대구역까지 약 20㎞ 거리. 인터뷰 외에 '불금'의 차량 정체를 뚫고 1시간 안에 도착해야 한다는 새 미션이 생겼다. "운전 잘한다. 걱정 마시라"고 큰소리는 쳤지만 꽉 막힌 도로 때문에 진땀이 비실비실 났다. 이 감독이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한다. 못다 한 질문은 차 안에서 던졌다. 이 감독은 '배리어프리 영화제' 홍보대사다. 배리어프리 영화는 기존 영화에 시각,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화면 해설과 한국어 자막을 넣어 장애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말한다. 왜 홍보대사를 했느냐고 물으니 "왜 했긴. (주최 측이)시키니까 했지"라며 질문한 기자를 타박했다. 수익을 내야 하는 제작사 입장에서 소수 관객을 위해 별도의 비용을 투자하는 것은 자본주의 논리에 역행하는 것이다.

"문화 사회는 소외계층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알 수 있어. 예전보다 우리 사회에 신체 장애인들을 위한 편의 시설이 많이 생겼듯이 영화에도 이들을 위한 배려가 필요해요. 모든 영화를 이렇게 만들 수는 없지만 배리어프리 영화제를 꾸준히 진행하다 보면 힘을 발휘하는 날이 올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에요. 아니, 진짜 비장애인인지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지난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영화 '소원'(2013)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소원은 '조두순 사건'을 모티브로 해 고통받는 아이와 가족들의 아픔을 그린 예민한 소재였다. 이 감독은 영화를 연출할 때 시나리오를 직접 쓰거나 기획 단계부터 함께 하지만 소원은 외부에서 의뢰받은 첫 작품이다. 이 감독은 "하기 싫은 마음이 먼저였다. 하지만 이 영화를 하지 않으면 마치 피해가는 듯한, 회피하는 부끄러움이 들 것 같아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마음 끌리는 대로 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물론 걱정도 있었다. 이 사건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뉴스가 세상에 알려진 뒤 '피해 아동으로 장사하려고 하나' '두 번 죽이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그는 "(성폭행 피해 아동에 대한) 2차 피해 우려도 당연히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도 이런 걱정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성공 말고 행복을 설계해야지"

강연에서는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은 뭐냐'는 질문부터 '왕의 남자라고 영화 제목을 지은 이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법' '복제 가능한 영화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냐'는 고민도 있었다. 이 감독은 무대에서 이날 모인 사람들의 눈을 봤다고 했다. "나는 앞에서 그 사람들 눈을 봤잖아요. 진짜 초롱초롱했다니까.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구나. 그래서 더 성실하게 대답했어요."

그는 숙명과 운명을 화살에 비유해 설명했다.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이어서 피할 수 없지만,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이기 때문에 피할 수 있다고. 그의 말대로라면 운명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이 감독은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질문했던 여성 청중(35)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질문하기 전 짧은 자기소개를 했었다. 대학에서 예술을 공부하다가 3학년 때 그만두고, 네팔로 여행을 갔는데 함께 여행하던 친구가 교통사고로 죽었고,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고 했다. "자기 독백이잖아요.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씩씩하고 용기있는 사람이었어요. 여행지에서 친구가 죽고 힘들었을 텐데. 운명을 뚫고 넘어선 거죠. 이 친구가 강연 끝나고 편지를 줬는데 기차에서 읽어봐야겠어요."

이 감독은 기자에게도 질문을 던졌다. 우리 사회의 행복에 관한 질문이었다. "한 사회의 행복 지수는 전체 구성원들이 느끼는 행복의 총합이라고. 일부만 행복하다고 이 사회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건 아니잖아요? 우리는 성공을 설계하지 말고 행복을 설계해야 해요. 이 시대에 왜 혁명이 없는 건데. 선거가 혁명이고 세상을 바꾸는 거잖아.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투표해야 해요. 그래놓고 젊은 사람들이 세상이 안 바뀐다고 불평할 자격이 있어? 특히 대구! 젊은 사람들 투표 좀 하라고." 또 이 감독한테 혼이 났다.

점점 동대구역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아직 기차가 떠나지 않았다. 이 감독은 악수하고 기차를 타러 떠났다. '행복을 설계하라.' 그가 대구 청춘에게 던지고 간 화두는 결국 성공이 아니라 행복이었다.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 이준익 감독은…

이준익 감독은 1959년 태어났다. 세종대 동양화과에 79학번으로 입학했다가 자퇴했다. 여성잡지인 '주부생활'과 '여성자신'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재능을 살려 삽화를 많이 그렸고, 이후 서울극장에서 광고 카피를 쓰고 포스터 디자인을 했다. 영화광고 업계에서 자리를 잡았지만 어느 날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우리나라 어린이가 '나홀로 집에'(1990) 매콜리 컬킨을 보며 영웅심을 갖는 게 불편해 만든 어린이 영화 '키드 캅'(1993)의 감독으로 데뷔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1992년 씨네월드를 설립해 영화수입업으로 돌아섰지만 감독을 구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재데뷔'한 영화 '황산벌'(2003)이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왕의 남자'(2005)로 1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계에 이름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라디오 스타'(2006), '즐거운 인생'(2006), '소원'(2013) 등이 있다. 황수영 기자

※ 참고 도서: 데뷔의 순간(2014,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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