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입력 2014-12-11 07:56:14

지금 극장가에는 놀라운 기적 같은 일이 펼쳐지고 있다. 다큐멘터리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반전의 주인공이다. 작고 조용하게 개봉한 이 영화는 입소문을 타고 점점 커져서, 개봉 2주 차에도 돌풍을 이어간다. 10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의 집계에 따르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전국 301개 스크린에서 개봉, 관객 수 30만5천 명을 기록했다.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 '인터스텔라' 같은 할리우드 대작에 이어 일일관객 수 전체 3위에 올랐는데, 놀라운 것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퓨리'를 제친 것은 물론, 스타들이 대거 출연하는 한국 상업영화 '빅매치'와 '덕수리 5형제'를 제치고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 중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개봉 11일 만에 관객 24만 명을 돌파했는데, 이는 올해 상반기 화제를 일으켰던 '한공주'보다 12일 빠를 뿐 아니라, 한국 독립영화 사상 최고의 관객 수를 기록한 '워낭소리'보다는 무려 20일이 빠른 수치이다. 2009년 새해에 개봉하여 30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끌어들인 '워낭소리'의 대기록이 깨지기를 은근히 기대할 정도다. 방학 시즌 대작들의 향연 속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 작은 영화의 선전이 어디까지 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 작품은 영화에 대해 관객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바에서 벗어난 새로운 취향의 등장이라는 사건으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방송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던 진모영 감독은 어느 날 TV에 등장한 노부부의 모습을 우연히 보고 무작정 강원도 산골로 찾아간다. 76년간을 부부로 살아온 98세 조병만 할아버지와 89세 강계열 할머니의 사랑스러운 로맨스 다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그렇게 탄생했고, 이는 진모영 감독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영화이다.

횡성에 사는 노부부는 깨끗하게 손질된 빛깔 고운 커플 한복을 입고 손을 꼭 잡고 걷는다. 23세 떠꺼머리총각에게 시집온 14세 소녀는 76년이 흘러도 여전히 귀여운 꼬마 아가씨인 양, 할아버지에게는 할머니를 골려주는 재미가 생의 활력이다. 낙엽을 쓸다가 장난을 치고, 꽃을 머리에 꽂아주고는 '곱네요'를 연발한다.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어 서로의 것이 더 잘되었다고 티격태격한다.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생존하기 힘든 속도전의 시대에 모든 사람들은 피로에 지쳐 있다. 속도와 함께 부상하는 것이 바로 '힐링'이다. 조금이라도 늦춰지면 훌쩍 뒤떨어지고 마는 속도전에 지친 수많은 사람은 위안이 필요하다. TV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는 주인과 손님이 밥을 해먹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일과가 없다. 그런데도 보고 있으면 편안해지는데다 재미까지 느껴진다. 예능의 관념이 바뀌어가고 있듯이, 이야기가 쉴 틈 없이 전개되고 컴퓨터그래픽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스펙터클이 눈앞에서 팡팡 터지는 블록버스터들의 감흥에 무뎌져 가고 있을 때이다. 이 영화에는 특별한 사건이나 화려하고 세련된 비주얼이 없다. 유명배우의 조력이나 잘 포장된 음악도 없다. 피부는 쭈글쭈글하고 손마디는 거칠고 퉁퉁 부어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하지만, 이 노부부의 해맑고 화사한 미소만으로도 위안을 얻는다.

온갖 질곡의 역사를 겪었을 그들의 눈물겨운 과거 이야기는 영화에서 전혀 펼쳐지지 않는다. 한때는 꽤 미남이었을 게 분명한 할아버지의 그 흔한 젊은 시절 사진 한 점도 없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그 사실만 우리는 바라볼 뿐이다. 그런데 별일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두 인물의 존재를 보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과 위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강점이다.

할아버지의 사랑스러운 개가 죽고, 할아버지의 기력은 점점 약해진다. 할머니는 이별이 멀리 있지 않음을 예감하고 76년간 이어진 긴 동행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계절이 가고 오듯이, 꽃이 피고 지듯이, 누군가는 왔다가 떠나야 한다. 그리고 그 떠난 자리에 또 다른 누군가가 찾아온다. 이와 같은 자연의 이치와 섭리를 깨닫는다면 세상에 대한 미련을 저 멀리 던져놓고 현재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걸 두 지혜로운 노인이 자신들의 삶으로써 몸소 보여준다.

할아버지의 기나긴 삶과 함께했을 빈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소박한 생이지만 아름다웠던 부부의 행복한 동행 이야기는 전 세대에 커다란 감동을 줄 것이다. 우리 부모님의 인생이 사랑스러워지고, 나의 늙어감에 대한 두려움이 씻겨 나간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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