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없어도 운동장 근처서 휴식, 온라인 SNS 통해 여론 이끌기도…'배영수 잔류'
올해 프로야구에서는 팬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메이저리그 캔자스시티의 열혈 팬 이성우 씨는 미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고, 국내에서는 팬들의 성난 목소리가 감독'구단 경영진의 진퇴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삼성 라이온즈의 통합 4연패 역시 대구경북 팬들의 뜨거운 응원이 뒷받침됐음은 물론이다. 4년 연속 600만 관중을 돌파하며 '국민 스포츠'의 위상을 과시한 야구계에서 파워집단으로 떠오른 팬들을 만나봤다.
◆사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지난달 22일 대구체육관에서 열린 삼성의 팬 페스티벌에는 3천여 명이 운집했다.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선착순으로 배부했던 입장권은 순식간에 동났다. 한국갤럽의 최근 여론 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프로야구단으로 꼽힌 팀다운 열기였다.
이날 행사에서는 입장권 추첨 행사도 열렸다. 최고가 경품이었던 55인치 커브드 TV의 행운을 잡은 김대훈(43) 씨는 프로야구팬이라면 친숙하게 여겨질 만한 인물이다. '신에게는 아직 8회가 남아있사옵니다' '전설로'(이상 이승엽) '개그로'(박석민) 등의 톡톡 튀는 팻말을 들고 응원하는 그의 모습이 수시로 TV 중계 카메라에 잡히기 때문이다.
"선수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그는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삼성의 어린이회원으로 가입한 골수 팬. 그동안 수집한 선수들의 사인 볼이 2천500개가 넘고, 가장 좋아하는 이승엽 선수의 유니폼은 시즌별로 모두 소장하고 있다. 개인택시 기사로 바쁘게 살면서도 삼성의 홈 경기는 거의 빠지지 않고 관람하고, 2군 경기가 있는 날에는 경산볼파크까지 찾아간다. 심지어 경기가 없는 날에도 대구시민야구장 근처에서 식사하고 휴식을 취할 정도다.
"올해 초 삼성의 오키나와 전지훈련 팬투어가 유일한 해외여행 경험"이라는 그는 "영화 '더 팬'에서 광팬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로버트 드 니로를 닮아가는 게 아닌지 스스로 걱정이 된다"며 웃었다. 삼성 선수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간 덕분에 '형님, 동생' 하는 사이이지만 "입장 바꿔서 생각하면 선수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김 씨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꼽은 명장면은 2002년 삼성의 한국시리즈 첫 우승과 2010년 양준혁의 은퇴식. 2002년 우승 당시에는 기쁜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다가 관중석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장을 지키는 것은 팬으로서 당연한 일"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김 씨는 야구장에서 만나는 대구 팬들이 개성이 무척 강하다고 평가했다. 다만 경기 결과에 집착하는 경향은 아쉽다고 지적했다. 해마다 최하위에 머물러도 열성적인 응원을 보여준 덕분에 '보살'로 불리는 한화 팬들처럼 일희일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선수들이 다치지 않고 오래오래 경기장을 누비기만을 바란다"며 "야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행복"이라고 강조했다.
◆이제는 '팬심 야구'
팬들은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여론을 이끌기도 한다. 배영수가 한화와 계약을 맺으면서 무위로 끝나기는 했지만, 삼성 팬들은 그의 잔류를 성사시키는 '기적'을 만들 뻔했다. 삼성에서 등번호 25번을 달았던 배영수의 복귀를 기원하는 인터넷 카페 'Lions 25'에는 며칠 만에 400여 명이 모여들었고, 자발적인 모금으로 신문에 응원 광고까지 싣는 열성을 보였다.
이 카페 회원인 정진수(33'회사원) 씨는 배영수의 한화 이적이 발표된 3일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했다. SNS를 통해 밤새도록 회원들과 안타까운 마음을 달랬지만 끝내 서운함을 떨치지 못한 탓이다. 그는 "모금 운동에 1천원을 보탠 초등학생부터 몇만 원씩 낸 중년의 아저씨'아줌마까지 팬들의 심정은 똑같았다"며 "다른 팀에서 뛰더라도 배영수 선수를 끝까지 응원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그동안의 모금액을 7일 미혼모 복지시설인 대구 혜림원에 전달하기로 했다.
프로야구계에서 팬들의 영향력은 앞으로 더욱 커질 전망이다. 구단'선수들과 일체감을 느끼려는 팬들의 욕구는 자연스러운 면도 있다. 하지만 바람직하지않은 현상이라는 우려도 함께 제기된다. 구단들이 성공적인 운영을 위해 어디까지 팬들의 입장을 반영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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