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관 이정 축출" 병풍바위 결의 장정들 영해부성 무기고 습격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해방 이후 올해 11월 말 기준 독립유공자들 중 경북 출신이 가장 많은 2천71명에 이른다. 경북에선 안동이 344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영덕으로 206명에 이른다.
하지만 영덕이라면 '대게'를 떠올리는 것이 현실이다. 안동처럼 영덕의 정체성으로 인식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영덕 항일운동의 역사적 뿌리와 흐름의 생생한 현장을 짚어보고 영덕 혼의 자부심을 일깨워 본다.(전문)
◆창수 병풍바위에서 거병
1871년 4월 29일(음력 3월 10일) 동학의 창시자 수운 선생의 제삿날 해질 무렵, 영해부 서면 우정동(지금의 영덕군 창수면 신기2리) 병풍바위 아래 전국 각지 출신의 600여 장정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모여들었다. 유건을 쓰고 청포(靑布)를 입은 이들은 가마솥 여섯 개를 걸어 놓고 소 두 마리를 잡아 인근 형제봉에 올라 엄숙한 천제를 지냈다. 소의 피를 손가락 끝에 바르는 의식으로 그들의 의와 기를 하늘에 고하는 축문을 읽었다.
제천의식을 끝낸 이들은 이어 죽창과 몽둥이, 횃불을 들고 육종골로 산을 내려와 원구리를 거쳐 10여㎞ 정도 떨어진 영해부성까지 한달음에 달렸다. 불과 2, 3시간 만인 해(亥)시에 영해부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당시 영해부사 이정은 23년 뒤 전라도 고부군 동학 접주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혁명의 빌미를 제공한 탐관오리 군수 조병갑에 견줄 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수탈이 상상을 초월했음은 인근 울진군지에도 나와 있다. "영해 부사(이정)는 생일잔치에 대소 민인을 초치하여 떡국 한 사발에 30금을 받을 정도로 수탈을 자행했던 사람이었다."
영해부성에 다다른 동학군은 미리 영해성에서 사정을 살피던 사람들과 접촉한 후 진입을 시작했다. 이에 관군이 대포로 대응해 4, 5명의 혁명군들이 죽거나 상처를 입고 잠시 주춤했으나 곧 전열을 가다듬고 성으로 들어가 무기고를 습격하고 부사를 잡는 데 성공한다.
혁명군은 부사 이정의 각종 부정부패를 낱낱이 추궁하는 한편 백성에게 대포를 쏜 것에 대해서도 죄를 물었다. 이정에 대한 단죄는 다시 날이 밝아올 때쯤 시행됐다.
◆강구 사람이 해월 최시형의 수제자
혁명군은 다음날 오후까지 영해부에 머물렀다.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는 격문을 내기도 했으며 관아에서 탈취한 돈을 영해읍내 5개 동에 골고루 나눠주기도 했다. 이후 혁명군은 인근 영덕현과 영양현의 점령과 상경 문제를 논의했지만 의견을 모으지 못했다. 또한 영해부의 난리를 접한 인근 진영과 관아의 관군들이 일제히 혁명군을 공격'추격함으로써 거사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결국 지도부는 영해부의 속현 영양현 일월산으로 퇴각했다.
이들 지도부 중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과 이필제 장군'강시원 책사'김낙균 무사 등은 일월산과 봉화를 거쳐 단양까지 피신한 가장 핵심 인물들이다.
이 중 책사 강시원은 영덕 직천고을(현재 강구면 원직리) 사람으로 당시 해월의 뒤를 이를 사람으로 지목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동학의 1대 교주 수운 최제우 선생은 1861년 동학을 전파하기 위해 포덕문을 짓고 본격적인 포교에 들어간 2년여 뒤인 1863년 10월 28일 영덕을 찾았다. 강시원의 아버지 강정이 주점과 여관을 하며 수운의 생일잔치를 준비했던 것이다. 수운은 생일잔치에 모인 수많은 제자들 앞에서 인내천(人乃天)사상을 설파했다.
향토 사학자 이완섭(53'전 영덕군 의원) 씨는 당시 영해'영덕 지역 동학교도 수가 2천여 명이 넘었다고 밝히고 있다. "해월 선생은 현재 포항의 청하면 마북리 쪽에서 한지 기술자로 일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한지산업은 경주가 최고로 번성했고 동해안 일대에서는 영덕'영해가 그 뒤를 이을 정도로 번성했다. 이것이 이 지역 동학교도들이 많은 주요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수운 선생은 영덕 직천마을 생일잔치가 있은 지 한 달여 만에 제자 17명과 함께 체포됐고 이듬해 3월 대구 관덕정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함께 체포된 제자들 중 초대 영해 접주 박하선도 포함돼 있었다. 영덕'영해와 인연이 깊었던 수운 선생의 장례에 많은 영덕'영해 사람들이 발벗고 나섰다는 것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민란으로 폄하된 혁명
영해동학혁명군은 거사 당일 형제봉에 올라가 동학의 뜻을 외우며 천제를 올리고 축문을 읽었다. 동시에 해월 선생'강시원 책사 등 주요 참가자 46명의 명단을 따로 작성했고, 별무사(別武士)'중군(中軍)'선봉(先鋒) 등 첩지도 주었다.
거사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일반 평민은 홍(紅), 동학교도는 청(靑)으로 군호(軍號)도 정했다. 더불어 야간 기습과 혁명 이후 치안의 유지 등을 보아 치밀하게 준비된 거사였다.
영해동학혁명에서 전투를 주도했던 인물인 이필제는 영해동학혁명 6개월 전인 1870년 10월쯤 당시 영양에 피신해 있던 2대 교주 해월 선생에게 사람을 보내 동학 1대 교주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신원(伸寃)을 추진하자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동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한 상황에서 이를 망설이던 해월을 설득한 것이 영해지방 동학지도자들이다.
이 때문에 영해동학혁명을 1차 교조신원운동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군사적인 부분은 이필제가 맡았지만 해월의 참여가 없었다면 단순한 민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거사가 결정되자 이들은 전국에 통문을 보내 전라도, 대구에서까지 동조자를 얻었고 해월은 거사 자금을 교도들을 통해 조달했다.
대부분의 기록에서 아직까지 영해동학혁명은 동학혁명의 시발점이 아닌 '이필제의 난'으로 머물고 있다. 당시 관의 기록은 거사 참가자들을 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또한 현재까지 교조 신원이나 폐정 개혁 등에 대한 어떠한 문서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거사에 참가했다 잡혀 효수형에 처해진 영해 사람 박한룡은 관군의 심문에서 동학인으로서의 당당함을 끝까지 유지했다. 그는 분명 영해동학혁명군이었다.
"병풍바위 축문에도 나와 있지만 누구나 하늘상제님을 모시고 섬기는 21자 주문과 같이 인간이 존귀한 가치는 누구나 차별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자존의 무극대도(無極大道)가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다. 천지신명께서도 하늘에 고한 축문을 들어주신다면 백년 안에 후천개벽의 시대는 활짝 열릴 것이다."
영덕 김대호 기자 dhkim@msnet.co.kr
취재협조=영덕군'김진균 후손 김낙동 씨'향토사학자 이완섭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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