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으로] 신춘문예와 벨린스키

입력 2014-11-29 07:57:49

이맘때쯤이면 분초를 아껴가며 밤과 씨름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전국 주요 일간지에서 공모하는 신춘문예에 응모하려는 문학 지망생들이다. 기성 문인들치고 신춘문예에 한두 번 도전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만큼 신춘문예는 문학 지망생들에게는 영원한 꿈이요, 기성 문인들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골의 원두막 같은 존재다.

그 신춘문예가 올해로 100년을 맞았다. 1914년 12월 10일 매일신보 1면을 장식한 신년문예모집(新年文藝募集)이 그 효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춘문예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19년 매일신보가 '신년현상공모'를 내면서였다. 매일신보의 뒤를 이어 동아일보가 1924년에 '현상문예대모집'이란 이름으로 문인을 선발하던 것을, 이듬해 그 명칭을 신춘문예로 바꾸면서 본격화되었다. 한때는 폐지론까지 대두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문학을 꿈꾸는 신인의 등용문으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신춘문예의 가장 큰 매력은 새해 아침에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깜짝 등단한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푼푼한 상금도 한몫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거기다가 짧은 기간에 단판 승부를 본다는 짜릿함과 공정한 심사에 대한 믿음 등이 어우러져 신춘문예라는 여의주를 거머쥐기 위해 마감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이맘때쯤이면 전국의 수많은 문학 지망생들이 치열한 밤을 보낸다. 우리나라만이 있는 이러한 문학축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나는 아직도 새해 첫날에 배달된 따끈따끈한 호빵 같은 신문을 펼쳐들 때의 설렘을 잊지 못한다. 풋풋한 잉크냄새를 풍기며 알살을 드러낸 당선작은 그대로 황홀한 무지개였다. 전국 일간지를 사러 집을 나서는 일도 새해 첫날 나의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집 근처 가판대에 원하는 신문이 없으면 휑하니 동대구역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새해 하루는 오롯이 신춘문예에 바쳐졌다. 내가 운 좋게 당선의 말석을 차지한 뒤에도 나의 이러한 연례행사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시서늘해진 열정을 지피고 느슨해진 긴장을 옥죄는 데는 그만한 약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의 연례행사는 시득부득해졌다. 나이 탓일 수도 있겠으나 작품이 예전 같지 않아서였다. 글이 희멀겋긴 한데, 마치 생화가 아닌 조화를 보는 듯한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다문다문 당선작 없는 가작도 발표되었었다. 이 가작을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읽으면서 왜 가작이 되었을까를 모모이 따져보는 것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좀처럼 이 가작을 만날 수 없다. 작품 수준이 분명 당선감이 아닌데도 버젓이 당선작이란 이름으로 얼굴을 내민다. 그러니 구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19세기 러시아에 37세의 나이로 요절한 벨린스키라는 문학평론가가 있었다. 그는 당대 러시아 문단에서 평론가로서는 최고의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가 곧 신인들의 등용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문학 지망생들이 작품을 들고 그의 집을 찾아가곤 했다.

어느 날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을 읽게 되었는데, 어느 대목에 이르러 소설을 읽다 말고 정장으로 갈아입더니 단정하게 책상 앞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그는 그런 자세로 꼬박 밤을 새워 그 소설을 다 읽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좋은 작품은 작가의 노고를 생각해서 최고의 예의를 갖추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곧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낼 신춘문예에는 벨린스키처럼 정장차림으로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서 읽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 본다.

이연주/소설가·정화여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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