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풍류산하] 저녁 종소리

입력 2014-11-27 07:50:04

아름다운 종소리는 그림이 되고 음악도 된다. 밀레의 '만종'을 보면 왜 그림이 음악이 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저녁놀이 지는 들판에서 농부 부부가 고개를 숙이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교회의 첨탑에서 울려 나오기 시작한 종소리는 붉게 물들어 있는 하늘 아래 들판으로 퍼져 나간다.

종소리는 시원(始原)은 있어도 종미(終尾)는 없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그 소리가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영구불멸이 대게 종소리와 맥을 같이하는 것은 아닐까. 밀레의 만종을 보고 있으면 나른하게 퍼져오는 낮으면서 깊은 종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다. 그것이 밀레 그림의 매력이다.

만종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는 화면 밖으로 튀어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이때부터 종소리는 화폭에 머물지 않고 음악으로 바뀐다. 밀레는 고향 바르비종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사랑이 빚어낸 풍부한 색채 그리고 이곳 주민들의 순박한 마음씨를 한데 어울러 만종이란 종소리를 만들어 냈다. 만종 풍경은 이 고장 사람들의 생활이자 밀레 자신의 삶이기도 하다.

성당 바로 밑 동네에 나의 고향집이 있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지근의 거리에서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는 유난히 청아하고 맑았다. 그 종소리는 탱자나무 울타리와 초가지붕 몇 개를 뛰어넘어 감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우리 집을 거쳐 고샅을 빠져나갔다. 종소리 끝머리의 질질 끌려가는 것 같은 낮은 여음은 마음을 맑게 해주는 청량제 구실을 해 주었다.

이른 아침 통근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뜀박질을 할 때와 저녁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있으면 삼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다니는 교회의 새벽종 소리는 소리가 맑지 못해 전혀 음악적이 아니었지만 성당의 종소리는 유난하게 여운이 긴 아름다운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동네 이발소의 거울 위에는 두 개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 하나는 백조의 호수였고 다른 하나는 만종이었다. 머리를 깎다가도 성당의 삼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면 실눈을 뜨고 부부의 기도하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종소리는 그림 속 지평선 끝에 있는 교회의 첨탑에서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곤 했다.

나중 고향을 떠나온 후 이발소 벽에 붙어 있던 그림이 생각나 그걸 구하려고 나가 봤지만 이발소는 없어지고 만종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만종이야 화랑에서 복사본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내 고향의 유치 하면서도 투박한 그 그림만 못할 것 같아 갖고 싶은 욕심을 접고 말았다.

나이가 들고 세월이 깊어지면서 종소리에 집착하게 된다. 어릴 적에 들었던 사무치게 그리운 그런 종소리는 요즘은 들을 수가 없다. 새벽 기도에 나오라는 교회당의 종소리는 아침잠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금지 된 지 오래다. 성당의 삼종소리도 무슨 이유에선지 끊긴 지가 한참 되었다. 악기에서 어쩌다 종소리를 닮은 '댕댕댕'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화들짝 놀라지만 그건 종소리가 아니었다.

러시아 민요 중에 '저녁 종소리' '트로이카의 작은 종' '종소리는 단조롭게 울리고' 등 종소리에 관한 것들이 많다. 큰 맘 먹고 종소리를 사러 시중 서점에 나가 CD판을 다 뒤져 봤지만 내가 원하는 종소리는 구할 수가 없었다. 대신에 '코사크인 막심' '트로이카' '12명의 도둑 이야기'가 들어 있는 음반 하나를 겨우 살 수 있었다.

"저녁 종! 저녁 종! 얼마나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지/ 어린 시절 고향/ 내가 사랑하던 아버지 집이 있던 곳/ 난 저녁종과 영원히 이별했네"라는 아주 낮은 저음으로 노래하는 '저녁 종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나의 기도는 아직 하늘에 닿지 못했다. 러시아인이 아닌 이방인들도 이 곡을 들으면 고향의 향수에 젖어든다는데 불원 그런 날이 오겠지.

종소리가 듣고 싶을 땐 컴퓨터를 열고 솔렘 수도원의 종소리를 듣는다. 검은 옷에 검은 안경을 쓴 늙은 수도사가 줄을 당기는 종소리를 듣고 있으면 귀와 눈이 열리고 마음까지 열린다. 홍수 지는 날 강변의 모든 쓰레기가 깨끗하게 실려 나가듯이 내 마음의 묵은 때는 수도원의 종소리로 말끔하게 씻어 낸다.

'뎅 데엥 데에엥….' 종소리가 울려 퍼질수록 그리움이 익어간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추억이 여물어간다. 종소리가 들리면 열쇠가 없어도 시동이 걸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나는 고향으로 간다.

수필가 9hwa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