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맛 탁월한 과하천 샘 '금릉주천'서 오늘날 지명 유래
한반도 남부의 중앙에 위치한 김천은 도시의 형성과 성장 과정에서 역(驛)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형적인 역촌(驛村)이다. 역이 커감에 따라 사람과 문물의 집산으로 큰 장이 들어섰고, 역과 장을 중심으로 역마을과 시장마을이 생겨났다. 김천이 1949년 대구에 이어 포항과 함께 경상북도 내에서 두 번째 시로 승격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배경은 역과 시장 덕분이라는 게 중론이다. 김천역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말까지 약 1천 년간 지금의 김천초등학교(김천시 남산동) 일대를 중심으로 고성산 자락으로부터 감천변에 이르는 광범위한 권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김천역은 경상도 20여 개 속역을 관장하는 중심역인 도찰방역으로 각 속역에서 당도하는 역마 관리와 사신 접대, 진상품 관리 등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일찍이 역 주변에 역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속칭 역촌으로 불리는 마을이 형성돼 도시 발전을 이끌었다. 김천역과 시장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즈음 김천도찰방으로 부임한 이중환의 눈을 통해 본 김천역 주변 마을의 형성 과정과 지명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어본다.
◆세월의 풍상을 간직한 '찰방골' 역장 선정비
부임 후 처음 열린 김천장을 구석구석 둘러보느라 밤늦도록 강행군을 한 신임 도찰방 이중환은 늦잠을 잤다. 서울에도 종로길 좌우로 펼쳐진 시장골목 육의전(六矣廛)이 있지만 왕실과 국가기관에 독점적으로 물품을 대는 전문업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김천장 같은 인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제 목격한 김천장날 풍경은 서울에서 온 젊은 관리 이중환에겐 신선하게 다가섰다. 늦은 아침을 마친 이중환은 역 주변 마을을 둘러보고자 역리 임아무개를 불러 역관을 나섰다.
역마에 올라 역관을 나서다 보니 한쪽에 고려 공민왕 17년 장원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가 왕조가 바뀐 후에 태조를 모시며 이조전서를 지낸 이첨(李詹'1345~1405)이라는 선비가 김천역에 들렀다가 쓴 한시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낡은 집이 산기슭에 의지하였고 위태로운 다리는 옅은 모래를 건넜다. 땅이 기름져 가을에 풍년들었고 나무는 늙어서 해마다 꽃도 안 피네. 사신의 탄 말이 역 아전을 놀라게 하고 시골 풍속은 들노래에서 들려주네. 유연히 회포가 움직이는 것은 좋은 계절에 나그네로 지냄일세.'
"고려 때에도 김천역이 번성했음을 짐작게 하는구나." 역관을 빠져나오자 수행한 역리는 곧장 역로변에 도열한 수십 기의 찰방선정비가 있는 찰방골로 말을 이끈다.
"대대로 이 고을에 부임했던 찰방역장 나으리들의 선정비가 세워졌다 하여 이 마을을 찰방골이라 부릅니다요." 말에서 내려 잠시 선정비란 이름의 비림(碑林)을 둘러보던 젊은 선비 이중환은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꼈다. 짧게는 반년, 길게는 3년 남짓한 재임기간을 지냈을 도찰방의 이름을 새겨 빼곡히 들어선 선정비는 '찰방 아무개 영세불망비'라 새기고 재임기간만 기록해 뒀다.
지난 도찰방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딱히 베푼 선정이 있을 리 없는 도찰방의 선정비를 세우다 보니 공적은 기록하지 않고 재임기간만 새긴 탓이다. '이 많은 이들이 과연 선정을 베풀고 떠났을까?'
(이로부터 29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많던 선정비는 세월의 풍상 속에 대부분 사라지고 '찰방 아무개 영세불망비'란 희미한 이름 석 자를 기록한 4기의 비석만이 옛 김천역의 영화를 기억하며 역터를 지키고 있다)
◆김천의 지명을 탄생시킨 '지게동' 과하천
비림 앞에서 잠시 상념에 잠겼던 신임 도찰방 이중환은 역로를 따라 고성산 자락으로 접어들었다. 다소 가파른 산자락을 낀 역로를 오르다 보니 바위 한쪽에 학사대(學士臺)라 새겨진 큰 바위절벽이 나타난다.
"신라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김천에 들러 달포간 머물며 강학을 했다 하여 훗날 선비들이 새겨 놓은 겁니다요. 여기까지 오셨으니 지게동 과하천 물맛을 보시고 가시지요."
과하천 입구에 들어서니 샘물을 긷는 물지게 행렬이 늘어서 있다. 역마를 이끌던 역리는 사람들을 제치고 과하천 물을 바가지에 담아 온다.
"금릉주천(金陵酒泉)이라. 과연 물맛이 탁월하구나."
"예로부터 이 물로 술을 빚었는데 얼마나 물이 좋았으면 여름을 지내도 그 술맛이 변함이 없다 하여 넘길 과(過)자에 여름 하(夏)자를 써서 과하주(過夏酒)라 부릅지요."
눈치 빠른 역리는 지게동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도 설명했다. "과하천 샘물을 길어다 술을 빚느라 물지게 행렬이 연중 장관을 이루었다 하여 일대 마을 이름을 '물지게동' 혹은 '지게동'이라 부릅니다요."
이중환은 역관에서 잠시 읽었던 여이명이 기록한 '금릉승람(金陵勝覽)'의 내용을 떠올려 본다.
'옛날에 금(金)이 나는 샘(泉)이 있어 김천(金泉)이라 했다. 그 샘물로 술을 빚으면 맛이 향기로웠기 때문에 주천(酒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금을 캐는 부역이 두려워 그 샘을 묻어버려 지금은 그 장소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다만 김천의 과하주는 여산(礪山)의 호산춘(湖山春)과 더불어 국내에서 이름 있는 술이 됐는데 타지 사람들이 금릉 사람에게 술 빚는 방법을 배워 가지만 그 맛은 본토의 술만 같지 못하니 이것은 물이 타지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무릇 특산품이란 각기 자연환경과 연관돼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말하기를 아름다운 술은 중국의 난릉(蘭陵)과 신풍(新豊)의 것을 칭송하니 이치가 그럴 법도 하다. 무신년에 김천찰방 배유화와 방백 심재가 지은 시에 샘 동편의 작은 산을 일컬어 주향산(酒香山)이라 했다.'
이중환은 "김천의 지명이 금샘에서 유래했다고 하더니…. 과하천이 금샘을 말하는 것이구나"라며 혼잣말을 했다.
(과하천의 원래 이름은 금천(金泉)이었다. 옛날 이곳에서 금이 출토돼 금광으로 사용됐으나 물이 차오르면서 우물이 됐다. 고려시대 초에 역이 들어서면서 샘 이름을 따서 금천역이라고 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지명인 김천의 유래가 됐다고 전해지는 유명한 샘이다)
◆늙은 역마의 슬픈 안식처 '뒷방마'
역로는 고성산 자락을 돌아 늙은 쥐가 밭을 향해 내려가는 형상이라는 노서하전(老鼠下田) 형국의 노실고개를 넘어 이어진다. 노실고개란 지명은 '노서하전'이 주민들의 입을 통해 와전돼 불리는 지명이다. 노실고개를 넘자 곳곳에서 말을 이용해 연자방아를 돌리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소와 달리 군사용으로 사용되거나 양반가에서 기르던 귀한 말을 이용해 방아를 돌리는 모습이 특이해 역리를 돌아봤다.
역리는 이중환이 묻기도 전에 "나이가 들어 달리지 못하는 늙은 말들은 이곳으로 와 죽을 때까지 연자방아를 돌립니다요. 뒷방으로 물러앉은 말이라는 뜻으로 뒷방마란 마을이름이 붙었습지요"라고 알려줬다. 퇴역한 역마들을 모아 연자방아를 돌린다는 '뒷방마'(지금의 김천시 성내동 김천교육지원청 일대)는 연자방아골이라고도 불렸다.
"뒷방마라 이름 한 번 고약하구나." 나랏일을 하는 무수한 관원들을 등짝에 태우고 바람처럼 달리던 역마였건만, 어느덧 나이가 들어 뒷방으로 물러앉아 연자방아나 돌리고 있는 것을 보니 측은지심이 일었음인지 이중환은 저물어가는 고성산만 멍하니 바라봤다.
김천 신현일 기자 hyunil@msnet.co.kr
도움말=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참고문헌=금릉승람(金陵勝覽), 디지털김천문화대전
공동기획 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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