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으로] 대중음악과 로컬리티

입력 2014-11-15 07:45:50

바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한동안 목적 없는 외출을 삼갔다. 이미 약속한 방송과 원고, 강의를 제외하곤 일체의 요청도 거절했다. 쌓여만 가는 책보기도 미안하고 들어보라며 매일 우편함에 쌓이는 CD 보기도 마찬가지였다. 평론한답시고 명함 파고 다니면서 가지고 있던 알량함만 팔아먹고 사는 것 같아 불편했다. 쉬면서 머리 좀 채우려는데 밥 줄 테니 와서 강의하란다.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를 풀어달라는데 이건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승낙했다.

'점심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의 강의는 대구 중구청과 (사)시간과 공간 연구소가 기획한 프로젝트다. 소설가 '엄창석'을 시작으로 '김헌재' 동양대 교수까지 20명의 강사가 점심 한 그릇 하면서 이야기를 푸는 형식이다. 내 차례는 '대중음악과 로컬리티'에 대해 이야기해 달란다. 인문학 강의에 대중음악을 넣어 준 것은 감사한 일인데 한국 대중음악과 지역이라는 말은 어색한 조합이라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야 할지 고민이다.

한국에서 대중음악 담론은 대략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고 생산과 소비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중앙 집중이다. 지역은 인기 강사가 얼굴 비치는 수준이었고 대중 속에서 담론 형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언론과 학계는 역사적 접근에 우선했고 지역 중심의 의미부여에 집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역 대중들은 소비하는 거의 모든 생산물을 당연한 듯 중앙에 의존했다.

대중음악은 자본의 결과물이며 자본이 몰리는 곳에 생산과 현상이 집중된다. 이 시각은 대중음악이 20세기를 관통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음악이 상업화에 매몰된 결과물만은 아니라는 부분을 지적하고 대중이라는 계급을 규정한 것도 미국에서 일어났다. 특히 남미에서 일었던 노래운동(누에바 칸시온, Nueva Cancion)은 미국 대중들에게도 전해졌고 민권과 자의식에 대한 노래가 나오게 된다. 영국 또한 미국 문화의 수출품을 소비하는 시장에서 자신들의 양식을 통해 구현된 음악을 생산하게 된다. 유럽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대중이 자의식을 획득하고 대중음악이 유의미한 텍스트라고 선언하면서 로컬리티는 부각된다. 소외된 지역의 목소리는 푸념으로 시작되지만 지역이 지니는 역사와 정서가 반영된 양식을 만들어 낸다. 영국의 경우 스코틀랜드 출신 음악인은 분명히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정서를 담은 음악을 표현하고 웨일즈는 그들만의 양식을 표현한다. 런던은 그저 모든 것들이 모이고 소개되는 곳일 따름이다. 일본의 경우도 도쿄는 자본을 무기로 모든 문화를 흡입하는 괴물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이렇게 로컬리티가 분명한 모습을 가지게 된 계기는 지자체와 지역시민단체, 지역 미디어의 각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집단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음악을 우선 소비하고 지역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라 여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특이하다.

한국의 대중들은 지역이라는 말이 포함된 대중음악과 문화상품을 거칠고 정제되지 못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이런 인식은 오히려 지역에서 강하다. 지역 음악인들은 값싼 노동력 정도로 여겨지고 기반 지역에서도 외면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로컬리티를 논한다는 것은 부질없다.

지역의 정서와 언어로 지역을 노래하는 방법과 이를 소비하는 문화를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지자체와 미디어의 역할도 중요하고 시민단체의 관심도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선해야하는 것은 지역 대중이 로컬리티에 대한 자의식을 획득하는 일이다. 해묵은 계몽을 끄집어 낼 필요도 있다. '점심의 인문학'을 비롯한 인문학 열풍이 그 역할을 해 주길 소망한다.

권오성/대중문화평론가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