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무상 복지' 거짓말, 타락하는 민주주의

입력 2014-11-13 11:06:44

현대국가의 사회복지제도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로가 아니다. 그것은 출발부터 대중 민주주의하에서 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계산의 산물이었다. 대중 민주주의하에서 권력을 잡으려면 대중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사회복지제도는 이를 위한 좋은 수단이다. 세계 최초로 사회보험을 근간으로 한 현대적 복지제도를 도입한 독일 총리 비스마르크는 이를 정확히 꿰뚫어봤다. "(사회보험의 목적은) 연금 자격자들이 느끼는 보수적인 심리상태를 수많은 무산자(無産者)들로부터 끌어내는 것이다." "노령 연금이 있는 사람은…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다루기가 쉽다." "누구든 이 개념을 포용하는 자가 권력을 잡는다."

독일에 이어 두 번째로 사회복지제도를 도입한 영국의 재무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도 그런 통찰을 공유했다. 그가 귀족과 부유층에게 세금을 많이 거둬 빈곤층에 재분배하는 '인민예산'(The People's Budget)-그는 이를 "빈곤의 참상을 근절하기 위한 전비(戰費)"라고 했다-을 마련한 동기는 분명히 이타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민예산으로 뒷받침되는 복지제도가 선거권이 빠르게 확산하는 현실에서 유력한 득표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대 복지제도 탄생의 비화(秘話)는 권력 획득 경쟁에서 누가 더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복지제도를 제시하느냐가 승패의 관건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이후의 역사는 예고대로였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보수당이 1945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참패한 것이나 아르헨티나의 페론이 '민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으며 집권한 것은 생생한 예이다.

당시 영국 보수당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책임진다는 '베버리지 보고서'를 만들어놓고도 재원 문제 때문에 실천을 미뤘다. 반면 노동당은 베버리지 보고서의 적극적인 실천을 약속했다. 영국 국민은 조국을 구한 영웅 처칠을 냉정하게 외면했다. 페론은 노동자들에게 "즉시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으로 화답했다.

누가 더 많이 퍼주느냐를 놓고 무한 경쟁을 벌이는 한국의 정치판을 볼 때 '복지의 정치적 효용'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통찰에 다시 한 번 무릎을 치게 된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당시 민주당은 '초'중'고 전면 친환경 무상 급식'으로 승리했다. 이어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도 박원순 후보가 무상 급식을 내세워 이겼다. 이에 뜨거운 맛을 본 새누리당은 2012년 총선 때 '선별적 복지'에서 '보편적 복지'로 노선을 수정했고, 여야 모두 국공립보육시설 확대, 0∼5세 교육비 지원을 내거는 등 복지경쟁은 고속 엘리베이터를 탔다. 2012년 대선은 그 연장선상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97조 원짜리 공약과 문재인 후보의 192조 원짜리 대형 공약이 맞붙으며 '퍼주기' 경쟁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여야는 이렇게 통 크게 인심 쓰겠다고 하면서 그 돈은 어떻게 마련할지는 함구했다. 복지 비용이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은 뻔한 이치-그래서 '무상(無償) 복지'는 거짓말이다-인대도 여야 모두 증세(增稅)는 없다고 했다. 대신 불요불급한 국가사업을 줄이고 재정의 낭비적 요소를 개선하는 것으로 재원 마련은 가능하다고 '뻥'을 쳐댔다.

이런 낯 두꺼운 요설(妖說)에 국민은 잘도 속아 넘어갔다. 아니 '무상'이란 기만적 수사(修辭)에 스스로 속고자 했다. 세금은 더 내기 싫은데 공짜는 받고 싶은 대중의 이기심과 이를 선거에서 이용하려는 정치인의 교활한 셈법은 그렇게 야합(野合)했다. 그 결과가 지금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의 '복지 디폴트(채무 불이행)'이다. 그런 파국을 경고하는 소리가 선거 때마다 나왔으나 정치권과 국민 모두 외면했다. 이렇게 포퓰리즘과 대중의 공짜 바라기는 민주주의를 타락시킨다.

불과 3년 만에 '공짜 시리즈'의 청구서가 날라오자 정치권에서 증세 얘기가 슬슬 나오고 있다. 그러나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증세 얘기는 보편적 복지를 전제한 것이다. 어리석은 것도 이 정도면 절망적이다. 선험자가 빠져나오려는 행로를 뒤따라 가겠다는 것이어서 그렇다. 서구 복지선진국은 보편적 복지에서 선별적 복지로 갈아타는 중이다.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권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그렇다면 국민은? 마찬가지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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