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게르에서의 어느 한적한 밤. 초승달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서쪽 구릉으로 넘어가 버리고 별빛은 밤하늘 전체가 내 것인 양 더욱 영롱하다. 온종일 초원을 달려온 피로를 양고기 바비큐 안주에 독한 배갈로 풀고 난 뒤였다. "우리 한 잔 더 할까요." "좋지요." 술 한 잔씩을 들고 지음(知音)과 둘이서 잉걸불이 사위어가는 난로 옆에 마주 앉았다.
"풍류라는 게 무엇입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풍류에 천착해 온 지가 십여 년이 넘었건만 풍류에 대한 개념이나 질문에 답이 될 만한 이론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음을 그때서야 절실하게 느꼈다. '풍류는 바람이 흐르는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하려다 오히려 누가 될 것 같아 덮어버렸다.
"저는 옛 선비들의 시문과 가사를 두루 들춰보니 풍류란 시주색 풍월수(詩酒色 風月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 줄 풍류는 어디 갔지요." 하얘진 머릿속이 두 번째 질문을 받고는 까맣게 정전(Black out)이 되고 말았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었다. 아뿔싸, 시와 술이 어우러지면 자연스럽게 소리(音樂)가 나오는 법이요, 술과 색이 합치면 여인의 속치마에 난을 치는 그림(美術)이 되는 것을. 그때 왜 이런 대답을 못했을까.
고전 중에 풍류의 기운이 제대로 스며 있는 작품은 소동파의 적벽부가 아닌가 한다. 시인의 본 이름은 소식(蘇軾)으로 서기 1037년생이니 형님이라 부르기도 그렇고 할아버지라 부르기도 뭣하여 고인이 쓰던 호 그대로 동파라 부른다. 그의 아버지 순(洵)은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며 동생 철(轍)도 뛰어난 문인으로 삼부자가 '삼소'(三蘇)로 칭송받고 있는 문인 가족이다.
적벽부는 가을 달밤에 뱃놀이를 하며 조조와 주유의 풍류에 비겨 덧없는 인생을 노래한 절창이다. "임술 가을 기망(旣望)에 손님과 배를 띄워 적벽 아래 노닐새, 흰 이슬은 강에 비끼고, 물빛은 하늘에 이었더라. 한 잎 갈대 같은 배를 가는 대로 맡겨 일만 이랑의 아득한 물결을 헤치노라. 술을 들어 서로 권하며, 하루살이 삶을 천지(天地)에 부치니 아득한 넓은 바다의 한 알갱이 좁쌀알이로다. 우리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긴 강(江)의 끝없음을 부럽게 여기노라.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에 뜨이면 빛을 이루도다. 손이 기뻐하며 웃고,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드니 안주가 다하고 잔과 쟁반이 어지럽더라. 배 안에서 서로 팔을 베고 누워 동녘 하늘이 밝아 오는 줄도 몰랐어라." 동파의 시 속에는 시주색 풍월수는 물론 소리와 그림까지 들어 있었다.
동파의 입김이 우리 선조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선비 이규보와 김종직도 소동파의 시를 읽고 배웠다 할 정도로 마니아였다. 또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金富軾)은 소식의 식자를, 동생 김부철(金富轍)은 소철의 철자를 따와 이름을 지었다니 동파에 대한 추앙의 도를 가히 짐작게 한다.
나 역시 적벽부를 접한 후 괜히 동파에 빠져들었다. 중국 여행을 가면 반드시 동파육 먹기를 원했으며 강에서 배를 타고 낭떠러지 강안을 지날 때면 '여기가 적벽을 닮은 곳인가' 하고 동파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다가 십여 년 전인가. '나무를 찾아서'란 모임에서 답사를 끝내고 뒤풀이 막걸리판을 벌이는 계획이 잡혀 있었다.
그날이 마침 음력 7월 보름인 기망이어서 카페지기에게 "금호강이 내려다보이는 목로집 2층에 자리를 잡자"고 청을 넣었다. 나의 속셈은 창가에 앉으면 이쪽 강안은 보이지 않아 유람선을 탄 것이나 다름없을 것 같았다. 계획은 적중했다. 천장의 전등까지 줄을 타고 내려온 흔들리는 백열등이어서 우리 자리는 영락없는 유람선 안이었다.
내가 마치 동파의 손님이나 된 것처럼 기분이 아주 좋았다. 동파의 손님들은 퉁소를 불어가며 노래를 불렀지만 금호강 손님들은 무반주로 뽕짝에서 동요까지 이어 달리며 막걸리를 마셨다. 내 차례가 돌아오자 강을 향해 '뚜나'란 노래를 불렀다. "오, 내 나이 어릴 때 내 입은 가볍고 바다 위를 떠돌기 나 참 원했네. 지금 남천 바라볼 때에 늘 들리는 것은 그 작은 뚜나 별이 부른다. 그 작은 뚜나 나를 부른다." 고교 음악시간에 배운 노래였다.
우리는 동녘 하늘이 밝아 올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주탁 위의 잔과 쟁반이 어지러울 무렵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내 생애 중에 다시 만나기 어려울 이런 풍류. 배 없이 뱃놀이를 즐긴 짝퉁 풍류!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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