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 소식 들은 이만도 선생 곡기 끊고 순절…항일운동 길 제시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興福軒)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였다. 이날 회의는 일제 데라우치 통감이 사전에 건네준 '한일병합조약안'을 체결하는 데 필요한 '전권위임에 관한 조서'에 순종의 재가를 받아내는 자리였다.
최고 통치자가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는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이완용은 순종에게서 받아낸 전권위임장으로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1910년 8월 29일. 순종은 이날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제에 넘겨주게 됐다고 발표했다. 순종은 황제 즉위 사흘째 되던 날, 조선 500년 사직을 이어갈 막중한 책임을 자신의 '부덕'을 탓하며 일제에 넘겨줬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민족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 전락해 버렸다. 한반도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됐다.
나라 잃은 분노에 전국에서 자정순국이 줄을 이었고, 1910년에만 38명이 순절하는 등 전국에서 70여 명의 선비들이 목숨을 끊었다. 이 가운데 안동에 살던 향산 이만도의 자정순국은 동은 이중언 등 안동 사람들로 하여금 순국의 물결을 이끌어냈다. 이 사건은 안동 사람 김대락과 이상용, 김동삼 선생이 눈 내리는 엄동설한에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행렬을 이끌고 만주벌판으로 떠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안동 사람들은 나라 잃음에 목숨을 끊거나 만주로 향해 항일투쟁에 나서는 등 저마다 선비로서 의를 실천했다.
◆끊어진 희망, 죽지 않고 무엇하리.
'자정순국'(自靖殉國),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나라를 따른다. 일제 통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한민족의 가장 극렬한 저항이 곧 목숨을 끊는 자정순국이었다. 선비나 유림들은 나라를 위한 마지막 선택으로 '맞서 싸워 물리치거나'(擧義掃淸), '은둔해 유교적 가치를 보존하거나'(去之守舊), '스스로 목숨을 끊어'(致命自靖) 왔다.
그 어떤 방법보다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이는 관직에 따른 '책임감', 왕에 대한 '충', 자신의 뜻과 다른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 했던 '결연함', 살아남은 자들에게 당당히 맞서 싸울 것을 전하려 했던 '가르침' 등 숱한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그들은 시대적 책임감 속에서 '의'(義)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다.
나라가 망하던 무렵 전국에서 70여 명이 목숨을 끊어 순절해 갔다. 가장 먼저 단식, 순절한 이는 안동 사람 향산 이만도(1842.1.28~1910.10.10)였다. 그의 죽음은 후손들과 안동 사람들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항일독립운동의 길로 나서게 했다.
향산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 더 이상 자신을 '소용'(所用)될 바 없는 존재라 여겼다. 자신을 없애는 길만이 온전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향산은 단식에 앞서 남긴 유소에서 '30년 전부터 벌어진 위기사태를 목숨 걸고 막지 못한 것'과 '을사년에 신하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 '경술국치를 막지 못한 것' 등 세 가지를 단식을 통해 죽음을 선택한 이유라고 했다.
향산은 "을미년 국모 시해 사건에 한 차례 죽지 못했고, 을사늑약 때 두 번째로 죽지 못했다. 산으로 들어가 구차스럽게 생명을 연장했던 것은 오히려 기다림이 있어서였다. 이제는 희망이 끊어졌다. 죽지 않고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라며 단식을 실천했다.
◆퇴계의 대의명분'의리, 선비들 자정순국 결단
향산의 죽음으로 후손들은 잇따라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 동생 만규는 의병에 참가하고 파리장서에 서명했다. 아들 중업은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분통을 이기지 못해 김도현과 의논, 토복 계획을 세우고 '당교격문'(唐橋檄文)을 지어 각 지방에 내붙였다.
향산의 며느리, 중업의 처였던 김락은 시아버지의 순국, 남편의 항일투쟁, 두 아들과 두 사위의 독립운동, 게다가 친정 식구들의 만주 망명 항일투쟁을 지켜봐야 했던 인물이었다. 그 자신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김락의 두 아들인 동흠과 종흠은 제2차 유림단의거에 참가했다. 종흠이 영양 석보 원리에서 자금을 모으다 탄로 나 1926년 형제가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향산의 자정순국 이후 곳곳에서 선비들의 의로운 죽음이 잇따랐다. 안동 하회에서 태어난 류도발은 나라가 무너지자 조상의 묘소를 찾아 하직 인사를 한 후 음식을 끊었다. 단식 17일째 저녁 무렵 그는 손수 몸을 깨끗이 씻고 자리에 바로 누워 세상을 떠났다.
영양지역의 유생 김도현은 국망의 위기에는 의진을 일으켜 전기 의병으로는 가장 늦게까지 항쟁을 벌였고, 신교육기관을 설립해 계몽운동에도 앞장섰던 인물이다. 나라가 망하자 도해(蹈海)라는 방식으로 자결 순국했다.
당시 죽음으로 항거했던 선비들은 전국에서 70여 명에 이른다. 2010년 현재까지 행적이 증명돼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인물은 61명이다. 그중에서 경북 출신 순국자는 18명으로 확인됐으며 안동을 비롯한 북부지역 인물이 13명에 이른다. 1940년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자결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14명이다.
안동문화권을 중심으로 한 경북에서 가장 많은 자정순국자들이 등장한 것은 퇴계학맥을 배경으로 한 위정척사론, 그리고 대의명분과 의리정신이 어느 지역보다도 강한 특성에서 나왔다.
◆한국독립운동사 51년, 빈틈없는 안동 사람들의 독립운동
안동 사람들의 독립운동은 한국독립운동사 51년 동안 줄곧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운동에서부터 광복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에 나섰던 안동 사람들은 '의'를 중시하는 실천을 보였다.
이 때문에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전국 시'군의 평균 독립유공자가 30여 명인 데 비해 안동은 310여 명으로 평균의 10배가 넘는 수치다. 지금도 확인 중인 미포상(未褒賞) 독립운동가가 700여 명에 달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안동 사람이 1천 명을 훌쩍 넘는다.
안동은 또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순국자를 배출했다. 외세의 침탈과 경술년 국치를 당하자 전국에서 70명이 목숨을 끊었는데 이 가운데 10명이 안동 사람이다. 가장 극단적이고 처절한 항거, 즉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절개와 의리로 항일투쟁에 나선 것이다.
특히 안동 사람들의 항일 독립운동은 종가와 전체 가문이 쓰러져가는 고통 속에서도 의병을 일으켰으며, 기득권을 포기하고 '만주 항일투쟁'에 나섰다. 소작인들을 위해 지주들이 앞장선 풍산소작인회 활동 등 하나같이 가지고 배운 자들이 역사적 의무를 다하려 노력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과 '의', 유교적 삶을 살아오던 선비들의 '애국충절'이 서려 있다.
안동은 1894년 갑오개혁을 시작으로 1945년 8'15광복까지 외세의 침탈과 일제의 강점에서 주권을 지키고 나라를 되찾으려 했던 '한국독립운동사 51년'을 빈틈없이 메운 독립운동을 펼쳤다. 대부분 지역의 독립운동이 의병활동과 3'1만세운동, 소수 군자금 모금에 그쳤지만 안동 사람들은 1894년 최초의 의병운동인 갑오의병부터 1944년 안동농림조선회복연구단, 명성회 결성까지 51년 독립운동사를 빼곡히 채워놓고 있다.
의병과 계몽운동, 의열투쟁, 3'1운동, 농민운동과 사회운동, 학생운동과 대중투쟁, 만주를 비롯한 중국을 무대로 한 해외 항일투쟁 등을 다양하고도 끊임없이 전개했다. 계몽과 혁신운동의 류인식,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선구자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만주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주도한 국민대표회의 의장 김동삼, 의열투쟁 김지섭과 김시현, 사회주의 운동의 선두주자 김재봉, 6'10만세운동의 총괄기획자 권오설, 아나키스트 류림, 민족시인 이육사 등 어느 한 분야도 빠지지 않았다.
김희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안동대 교수)은 "안동 사람들이 펼친 독립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사 51년 동안 모든 분야에서 흔적을 남겼다"며 "이는 퇴계학맥을 이어온 선비들의 의리와 대의명분에 따른 실천적 사례들"이라고 했다.
안동 엄재진 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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