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고 싶은 남자 외 38편/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 지음/이난아 옮김/현대문학 펴냄.
20세기 터키 문단의 보헤미안으로 알려져 있는 사이트 파이크의 단편소설 작품집이 국내에 처음으로 출간됐다. 그는 누구나 심각하게 여기는 사회문제가 아니라, 주로 상식과 질서, 먹고사는 문제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을 이야기한다. 어부, 실업자, 카페주인, 군밤장수의 친구, 웨이터, 여관 주인의 아내, 솜 타는 노인 등이 그의 소설 주인공이다.
사이트 파이크는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관찰함으로써 그들의 바람, 고민, 두려움, 희열 등을 보여준다. 때로는 속임수, 죽음과 같은 사건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렇고 그런 날들 속의 삶을 포착하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39편의 아주 짧은 소설이 묶여 있다.
'작은 키의 남자였다. 카라뮈르셀 상표 남색 바지를 입었고, 재킷은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그가 내 곁을 지나갈 때 무척이나 푸른 그의 눈동자를 보고는 마음이 다 상쾌해졌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그렇게 깨끗하고 푸른 눈동자는 본 적이 없었다. 일흔이 넘어 보이는 나이였다. 그는 민첩한 걸음걸이로 걸어갔고, 넓고 커다란 손톱이 있는 손으로 여전히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여전히 이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중략)
그날은 아주 화창한 날이었다. 바다도 시원했다. 나룻배, 여자들, 아이들은 유쾌했다. 마치 어느 누구도 그 누구에게 욕설을 퍼붓지 않은 날 같았다.(중략)
배에서 내릴 때 그의 분홍색 안색은 사라지고 없었다. 푸른색 눈은 생기가 없었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피곤하신가 봐요, 어르신."
"피곤하네….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군."
"정말요? 피곤하신 적이 없었다고요?"
"난 지금 정확히 일흔여덟 살일세. 지친 적이 한 번도 없었지. 난 지친 적이 없었어."
그날 저녁이 되자 노인은 위독해 보였다. 얼굴은 퍼렇게 변했고, 셔츠를 쥐어뜯지 못하는 손톱은 가슴의 털을 뜯었다. (나는 의사를 데리러 갔는데) 늙은 의사는 내키지 않는 듯 느린 걸음으로 나와 함께 왔다. 그는 오는 길에 "심장마비일 거요. 많이 늙었소?"라고 물었다. "일흔여덟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죽을 거요."
다음 날 두 명의 젊은이가 와서 죽은 아버지를 약국에서 데리고 나갔다.'
-솜 트는 노인- 중에서.
이처럼 지은이는 부둣가, 공원벤치, 술집, 여관 등 어디서든 자신이 본 서민의 삶을 작품 속에 녹여낸다. 때로는 지은이 자신이 작품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의자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이다. 자신의 무릎을 책상 삼아 글을 쓰기도 한다.
사이트 파이크는 종래 터키의 단편소설 기법을 허물고 자연과 인간을 단순하고 진솔하게 표현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사이트 파이크가 터키 문단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터키 문학은 굵직한 사회적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기법이 유행했다.
위 작품 '솜 트는 노인'에서 보듯 사이트 파이크는 사건 중심의 서사, 잘 짜인 플롯 등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문학적 조류나 외국의 문학 행보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소재 역시 가리지 않았다. 비단 손수건, 공장 노동자, 물고기, 개, 당나귀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와 인물을 작품세계로 끌어들여 묘사하고, 일종의 유행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터키 현대 단편소설사에 전환점을 찍은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유지를 기려 제정한 '사이트파이크문학상'은 오늘날 터키에서 가장 권위 있는 단편문학상으로 꼽힌다.
사회 풍토와 자연 풍광이 터키와 다른 한국 독자들이 읽으면 신비롭기도 하고, 밋밋하기도 할 듯하다. 때로는 '뭐야? 이게 끝이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이트 파이크는 자신이 관찰한 장면을 담백하고 단순하게, 짧게 전달함으로써 오히려 깊은 여운을 남긴다. 특히 개인의 실존적 삶에 대해 독자들이 자유롭게 생각해보도록 방치한다. 이 책은 출판 잡지사 현대문학의 '세계문학 단편선' 11번째 작품집이다. 421쪽, 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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