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이황이 교육용으로 발췌, 우암 송시열은 거의 외우다시피
동아시아 전통문화에서 유교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고, 유교를 말하면 공자와 맹자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후는? 중국과 한국의 유교사상 사에서 맹자 이후 주자(朱子)를 대표자로 본다. 중세 유교를 체계화했기 때문이다. 고려 말 원나라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우리나라에 주자학이 들어왔다. 조선조 건국과 더불어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한 나머지 주자학이 모든 학술 사상과 문화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했다. 선비의 책상에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이 '사서'(四書)와 더불어 나란히 놓여지고, '오경'(五經)은 밀려났다. 주자대전은 개인 문집이므로 평생에 쓴 모든 종류의 글이 다 모아져 있다. 그중에서 편지글이 사상 내용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데, 이는 옛날 학술 활동에서는 편지글로 학술 토론을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조에서 제일 먼저 이 편지글을 중시하여 발췌 편집하고, 제자 교육용으로 사용한 학자가 퇴계 이황(1501~1570)이다. 그 발췌 본이 바로 주서절요(朱書節要)다. 지금 안동 도산서원에 남아 있는 도산서당에서 이 교재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것을 모방하여 퇴계는 말년에 자신의 편지글을 발췌하여 자성록(自省錄)이라 이름 지었다. 이 책들이 모두 임진왜란 때 일본에 전해져 퇴계 존숭의 학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충청도에서 우암 송시열(1607~1689)이 본격적으로 주자 문집 전체에 대해 해석을 붙이기 시작했다. 송시열은 주자대전을 거의 다 외우다시피 했으므로 이때 주자학 편중의 부작용마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문집 또한 주자대전처럼 100여 권의 분량을 이루었다. 당시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주자에 대한 존숭이 극에 달하여 주자학의 이념화, 도그마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 정조(1752~1800) 역시 주자학을 좋아하여 우암을 추숭하였다. 그 결과 우암의 문집을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 이름 붙이도록 허락하였다. 조선조에서 중국처럼 성(姓)에 자(子)를 붙여 높인 유일무이한 케이스가 되었다. 정조는 주자와 송자의 글 중에서 닮은 글을 골라 편집하여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이라 했다.
한 말에 이르기까지 주자학 존숭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는데, 한 말에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외친 화서 이항로 역시 철저한 주자학자로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를 완성하였다. 남송 시기에 활약한 주자는 당시 북쪽 땅을 흉노에게 빼앗기고 구토 회복의 염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철저한 화이(華夷)사상에 입각한 중화주의(中華민족주의)를 갖고 있었는데, 화서 등 척사파들은 이것을 조선조 대외 관계에 그대로 적용하였다. 주자학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동희 계명대 윤리학과 교수 dhl333@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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