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나의 독재자

입력 2014-10-30 07:50:16

김일성인 듯, 김일성 아닌, 김일성 같은

'김일성'이 나오는 영화라니. 어째 보기도 전에 감정적인 주저함이 앞선다. 하지만 영화는 진짜 김일성이 아니라 김일성을 연기하다가 스스로를 김일성이라 굳게 믿으며 살았던 한 남자, 어느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실화를 기초로 한다. 때는 1970년대 초, 첫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 정부는 실제와 같은 리허설을 했다고 한다. 그냥 잊기에는 아까운 영화 '김씨 표류기'(2009)의 이해준 감독은 여기에서부터 영화의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리허설을 설계한 대통령과 그 주변의 청와대 사람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남북정상회담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러면 그때 김일성을 연기한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초점을 약간만 돌리면 흥미로운 상상의 다발들이 쏟아져 나온다.

영화는 아버지의 이야기이며, 유신시대와 IMF 시대, 격변기를 살아온 아버지와 아들이 만들어가는 가족 드라마이다. 한국영화에서 다루기 민감한 소재라는 차원을 넘어, 입에 담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존재를 소재로 하는 영화이다 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텐데, 영화는 매우 영리하게 이야기를 엮어낸다. 코미디 반, 눈물 반으로 실제 역사적인 배경 위에 허구인 개인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그곳에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넘어지고, 그렇지만 다시 일어서야 했던 보편적인 민초의 삶이 놓여 있다.

제대로 된 역을 소화한 적이 없는 무명배우 성근(설경구)은 남북정상회담 리허설을 위한 김일성의 대역 오디션에 합격한다. 연극은 중앙정보부의 치밀한 보안 하에 연극영화과 교수의 연출과 주사파 운동권대학생의 각본, 그리고 성근을 주연으로 하여 고통스럽게 준비된다. 성근은 엄마 없이 자라는 아들에게 생애 첫 주인공 역할을 근사하게 보여주고 싶은 맘이 간절하다. 정말 열심히 피 터지게 연습한다. 김일성의 손짓과 말투, 행동 습관, 그리고 외형까지 근접하게 되지만, 회담은 무산되고야 만다.

20여 년 후, 역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스스로를 여전히 김일성이라 믿는 아버지 때문에 아들 태식(박해일)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너무도 달라진 세상, 돈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1990년대 한복판에서 살아가야 하는 태식은 다단계 사업을 하며 위태롭게 버틴다. 빚 청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다시 옛집으로 모셔온 태식은 수령동지와 살게 되고, 이들 부자에게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수령동지 아버지는 천박한 부르주아 사상에 감염된 세상을 교화하기 위해 오늘도 길을 나서고, 아들은 빨리 집을 팔아 돈을 챙기고 떠나기만을 학수고대할 뿐이다. 1970년대 북한을 사는 아버지와 1990년대 남한을 사는 아들 사이의 거리는 아득하게 멀기만 하다. 그러던 중 다시 아버지가 무대에 설 날이 온다.

서슬 퍼런 1970년대 유신의 분위기와, 너도나도 부자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돈을 좇던 1990년대 분위기는 똑같이 광기의 시대다. 감시와 통제가 일상화되던 시절, 그리고 자유가 활짝 열렸지만 그 자유란 오로지 자본의 자유임을 알게 된 시기, 20년을 경과하며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을 영화가 생각하게 한다. 애증으로 가득한 딱딱한 부자관계는 성근이 왜 김일성 역할에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아들이 이해하게 되면서 스르르 녹는다.

촌스러운 70년대와 요란한 90년대를 묘사하는 디테일한 시대 표현이 볼거리를 풍성하게 한다. 이야기는 웃음과 감동을 오가며 감정선을 놓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상반되는 두 개의 캐릭터를 오가며 완벽한 가짜 김일성을 연기하는 배우 설경구이다. 그는 역할에 완벽하게 몰입되는 메소드 연기를 유연하게 펼쳐보인다. 영화가 끝난 후 연기에 압도되었다는 느낌을 전한다. 능글능글하고 뻔뻔한 아들을 연기하는 박해일의 연기 변신을 지켜보는 것도 흐뭇하다.

후반부의 리허설 재탕과 눈물로 부자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어쩌면 억지스럽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따뜻한 휴머니즘을 좋아하고, 영화는 시대의 소용돌이에서 자신을 잃어버려야 했던 불쌍한 한 남자를 통해, 소중한 것을 잊고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가슴을 울린다. 예민한 소재를 코미디로 버무려 내는 감독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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