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서각의 시와 함께] 어진 사람

입력 2014-10-27 07:23:51

어진 사람 - 백무산(1954~ )

어질다는 말

그 사람 참 어질어, 라는 말

그 한마디면 대충 통하던 말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양반이나 상것이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그 사람 어진 사람이야, 그러면 대충 끄덕이던 말

집안 따질 일이며 혼처 정할 일이며 흉허물 들출 일에도

사람을 먼저 보게 하는 말

나머진 대충 덮어도 탈이 없던 말

시장기에 내놓은 메밀묵맛 같은 사람

조금 비켜서 있는 듯해도

말끝이 흐려 어눌한 듯해도

누구든 드나들수록 숭숭 바람 타는 사람

보리밥 숭늉맛 같은 사람

뒤에서 우두커니 흐린 듯해도 끝이 공정한 사람

휘적휘적 걷는 걸음에 왠지 슬픔이 묻어 있는 사람

반쯤 열린 사립문 같은 사람

아홉이 모자라도 사람 같은 사람

아버지들 의논을 끝내던 그 말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어질기만 해서 사람 노릇 못해,

그럴 때만 쓰는 말

  -시집 , 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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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질다'는 말은 맹자의 사단(四端) 인의예지(仁義禮智) 가운데 인에 해당하는 말이다. 인은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즉 대상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가리킨다. 전 시대에는 어질다, 용하다, 착하다, 진국이다 등의 말도 자주 들을 수 있었고, 또 그런 사람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요즘 그런 사람 찾기 어렵다. 그런 사람들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세상이 각박해진 탓이리라. 시인은 그런 '어진 사람'을 찾기 위해 대낮에 횃불을 들고 사람을 찾던 그리스의 철학자와 같은 심정으로 이 시를 썼으리라. 그 많던 어진 사람들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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