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공연은 내가 노는 법, 전국민 휴대폰에 내 사진 있게 하고파
어렸을 때 방 안에 혼자 있어도 100명이 있는 듯 신나게 놀던 한 아이가 있었다. 늘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고 학교에서 장기자랑을 하면 1, 2등을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학교 축제 MC까지 맡아서 할 정도였다. 이 아이는 자란 후 대구 도심을 돌아다니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거리의 '젊은 광대'가 되었다. 이 젊은 광대의 이름은 정호재(27)다.
하얗게 칠한 얼굴과 주황색 줄무늬 옷, 낡고 큰 트렁크 가방, 입에서 나는 삑삑이 소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동성로를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정해진 날짜와 시간은 이야기하기 곤란하다. 언제 공연할지는 그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얀 얼굴 분장처럼 맑고, 공연 속 웃음만큼 유쾌한 사람 정호재 씨를 만나보았다.
◆"넌 연극할 줄 알았어"
정호재 씨가 연극을 하기로 결심한 건 고3 때였다. 어릴 때부터 쭉 태권도 선수로 활동했지만 고2 때 생긴 허리디스크 부상 때문에 그만두어야 했다.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던 그때 친구 한 명이 정 씨의 가슴에 또 다른 꿈을 꾸게 하였다. 고3 때였다.
"정말 조용히 학교만 다니던 친구로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서울의 대형 연예기획사에 오디션을 봐서 3차까지 통과했다는 거예요. 그때 '저런 친구가 한다면 나도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해 여름방학 때부터 대학 진학을 연기 쪽으로 정했어요."
연기 관련 학과 입시를 시작하기에 고3 여름방학은 매우 늦은 시기였다. 하지만 서울에서 극단을 하는 친척의 도움으로 수능시험 후 입시가 시작됐을 때 서울에 숙소를 잡고 극단 연습실과 숙소를 오가며 연기를 배웠다. 그렇게 한 달가량을 준비한 뒤 정 씨는 계명대 연극예술과 07학번이 됐다.
"오랜만에 중'고교 때 친구들을 만나면 친구들은 '요새 뭐하고 사니?'라고 물어봐요. 그때 '연극하고 살아'라고 말하면, 친구들은 '넌 그럴 줄 알았어'라며 전혀 놀라지 않아요. 어릴 때부터 광대의 끼가 있었단 걸 친구들은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거리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다
정 씨가 거리공연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1학년 말 선배가 추천한 아르바이트 때문이었다. 하얗게 분장을 하고 정장을 입은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역할을 맡은 정 씨는 그때 본 사람들의 반응에 '관객과의 소통'이라는 고리를 찾았고 묘한 매력을 느꼈다. 거리공연에 대해 마음을 제대로 굳힌 건 군대에 있을 때였다.
"사실, 군대 있을 때 연극을 포기할까 생각했었어요. 외모가 받쳐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기가 특출나게 뛰어나지도 않았거든요. 그래서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죠. 그러다 보니 너무 우울해져서 휴가 나왔을 때 '즐겁게 살자'라는 제 인생 철칙에 충실해져야겠다 싶어 영화 '스크림'에 나온 가면과 정장을 입고 동성로에 앉아 있었어요."
정 씨가 그날 '스크림' 가면에 정장을 입고 나온 시각은 오후 2시. 정 씨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사람이 있으면 두려움을 없애주려고 노력하고, 말을 거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대화도 나눴다. 음악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춤도 추는 등 최대한 재미있게 동성로에 나온 사람들과 신나게 즐겼다. 그렇게 놀다 보니 집에 돌아갈 때는 오후 10시가 됐다.
"그때 가면을 통해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달았어요. '아, 내가 있을 곳은 거리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휴가 복귀 뒤부터 전역할 때까지 내가 거리에서 어떤 걸 해 보겠다는 아이템을 계속해서 짜나갔고, 그때 생각한 것 중 일부가 거리 공연에 많은 도움을 줬죠."
◆거리를 지나는 관객들 모두가 배우
정 씨가 거리공연을 시작한 때는 2010년이었다. 몇 번 공연했는지는 셀 수가 없단다. 마음 내키면 분장을 하고 공연도구를 담은 낡은 가방을 들고 동성로로 나서기 때문이란다. 주로 하는 레퍼토리를 물어보자 정 씨는 살짝 곤란해했다.
"주로 하는 레퍼토리를 물어보시면 조금 난감할 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관객들의 반응에 따라서 내용이 확확 바뀌거든요. 예를 들자면 일단 앞에 있는 관객을 중앙으로 나오게 해서 이런저런 걸 시켜보는 거죠. 커플이 있으면 프러포즈도 시켜보구요. 관객이 배우가 돼서 이런저런 걸 하면서 저와 노는 방식이다 보니 정해진 레퍼토리는 사실 없어요. 굳이 따진다면 제 공연을 보고 느끼는 사람 모두가 배우고 레퍼토리예요."
관객과 함께 노는 방식으로 공연을 진행하면서 정 씨는 '무조건 관객을 웃는 모습으로 자리에 돌려보낸다'는 철칙으로 공연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맥주 캔을 던진 취객조차도 마지막엔 그의 팬이 된다.
"한 취객이 맥주 캔을 던졌는데 그게 제 머리에 맞았어요. 공연이 중단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저는 오히려 그 취객을 무대 중앙으로 불러서 이런저런 마임을 했죠. 화내는 척하다가 '화해하자'라고 껴안고, 그분이 안 보는 사이에 복수해버리는 식의 마임을 하니 모두 기분이 좋아져서 돌아갔어요."
◆전 국민 휴대전화 속 내 사진을 넣어보자
정 씨는 현재 극단 '도적단'의 대표다. 거리 공연뿐만 아니라 극장 공연도 해 보고 싶어 학교 선배들과 의기투합해 만든 연극단이다. 올해 3월에는 '이 밤이 깊어가지만'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소극장 '떼아뜨로 중구'에 올리기도 했다.
"극단 사람들이 같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첫 작품이에요. 첫 작품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했을 때 '젊은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고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하자'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어요. 거리 공연에서 했던 식으로 관객 참여 유도를 해 볼까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연기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됐죠. 공연을 보신 분들이 다들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좋아하시더라구요."
정 씨는 앞으로의 꿈,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 첫 번째는 대중들에게 인정받는 배우가 되어서도 거리에서 공연하는 것, 두 번째는 전 국민의 휴대전화 속에 자신의 거리공연 모습이 찍히게 되는 것, 마지막으로 죽을 때 광대 분장을 하고 관에 들어가는 것.
"저라고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지 않겠어요? 언젠가는 많은 대중이 알아봐 주고 제 연기를 인정해 주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렇더라도 거리 공연은 정말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항상 관객 가까이에 있는 배우가 되고 싶거든요."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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