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색채, 짓이기듯 두텁게 바른 물감층… 보기만해도 전율
'모래 발자국' 그림으로 꽤 이름이 알려진 친구가 지금 도쿄에서 활동하고 있다. 고교시절 그가 무척 좋아하는 작가라며 일독을 권유한 책이 있었는데 문고판 '고흐의 편지'였다. 나 역시 곧 그 책에 빠져들어 푸른 하늘색 배경에 엷은 황금색을 많이 쓴 고흐의 자화상을 따라 그려볼 정도였다. 실제 작품을 본 적이 없는 우리였지만 한동안 그렇게 고흐의 그림에 깊이 경도된 적이 있었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작품 한 점을 예로 들면서 예술작품에 대한 자신의 존재론적 철학을 전개시킨 적이 있다. 그 논문이 발표되었을 때 미국의 유명한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는 하이데거에게 작품을 보고 쓴 글이냐는 반박편지를 썼다. 하이데거의 답장을 받고도 그는 쉽게 의심을 거두지 않은 듯했다. 그 배경에는 회화작품의 경우 직접 본 것과 그렇지 않고 사진을 통해 알고 있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도 미술 감상 수업에서 고흐의 초상화 한 점이 프로젝터를 통해 영상으로 투영될 때 학생들 속에서 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고흐 작품의 색채나 구성에 놀라운 데가 있다는 것인데, 앞에서 예로 들은 그 작품을 나중에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대 미술관에서 봤을 때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그 작품은 바로 동생과 나눈 '편지'에서 언급한 고갱을 기다리며 아를에서 그린 자화상이었다.
네덜란드에서 파리로 이주한 이후 고흐의 마지막 몇 년은 흔히 불꽃 같은 것에 비유된다. 그만큼 극적이었고 불가사의한 면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간 동안 고흐가 그린 자화상만 40점이 넘게 남아있다. 유명한 노랫말 속에도 나오지만 온전한 정신을 유지한 채 진실한 그림을 위해 사투를 벌인 삶이었다. 짧은 생애 동안 그 많은 작품을 쏟아낸 열정 덕에 그에 관한 조명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고 매번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된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미술관 다음으로 고흐 작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미술관은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소장품 위주의 특별전을 펼친 바 있다. 또 '피나코텍 드 파리'에서는 고흐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에도시대 일본 풍속화 그림에 착안해 고흐의 풍경화와 히로시게의 그림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전시를 동시에 개최했다.
그리고 올해에는 오르세미술관이 야심 찬 기획으로 '고흐/아르토' 전을 열었는데 '사회에 의해 자살한 남자'란 자극적인 표현의 부제를 붙여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주목을 끈 이 전시 타이틀은 앙토냉 아르토가 1947년에 낸 책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었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아르토는 자신이 여러 차례 정신병원 진료를 받아왔던 터라 당시 고흐의 자살을 정신착란과 연결 짓는 것에 큰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1947년 오랑주리에서 개최된 고흐의 회고전을 보고 난 뒤 내린 그의 결론은 고흐를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이 광기나 진리에 대한 애타는 목마름 때문이라기보다 그 사회의 집단의식을 고발하는 쪽이었다.
오르세미술관 1층에 마련된 전시실에는 40여 점의 유화와 편지글, 스케치들이 아르토가 직접 그린 다수의 그래픽 작품들과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시 속에서는 제목에서 야기한 문제의식의 연결고리를 찾기 힘들었다. 어떤 맥락 속에 놓더라도 고흐의 작품은 그 자체로 전율시키는 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품이 얼마나 과감하고 대담한 실천들로 현대성을 선취했는지, 세계 곳곳에서 골라온 진수들을 볼수록 이 예술가의 놀라운 면을 깨닫게 되었다. 출품된 작품들은 거의 모두 신체적 장애로 자살했다는 두 작가에 대한 작품 외적인 분석과 상관없이, 색채는 화려하게 빛이 났으며 캔버스 위에 짓이기듯 두텁게 바른 물감 층들은 생동감이 넘쳤다. 그들의 감각적 탁월함을 차라리 다른 의미에서 비정상이라고 얘기하고 싶을 정도로 평범하고 통속적인 정서로는 도저히 구현하지 못할 수준의 세계를 다시 한 번 보여준 전시였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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