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10월은 눈물겨웠다. 입에 풀칠조차 쉽지 않았다. 1946년 2월 18일 대구의 한 신문에는 봉급생활자인 교사의 한 달치 생활가계부를 기재한 '일지방 교원의 고백'이라는 글이 실렸다. 가족은 점심을 먹지 못하고 쫄쫄 굶지만 쌀값 지출은 생활비 중에서 가장 높다는 하소연이다.
식량난이 심해지면서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는 것조차 삶의 일상이 된 것이다. 그해 8월에는 일본에서 돌아온 여인이 굶은 지 사흘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난다. 같은 달 19일에는 굶주림에 지친 남녀 수백 명이 경북도청에 몰려들어 식량을 달라고 아우성친다. 이뿐만이 아니다. 50여 명의 주민은 대구역에서 곡물을 실은 화차를 습격한다.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라는 신문 제목은 딱 맞았다. 식량난은 이미 예견된 재앙이었다. 해방 직후 식량 대책에 실패한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 가혹한 방법으로 하곡(보리) 수집(공출)에 나선다. 농민들은 최소한의 먹을 식량만 남기고 빼앗기다시피 헐값에 내놔야 했다. 그렇다고 도시민들이 제대로 식량을 배급받은 것도 아니었다.
해방은 되었지만 일제수탈의 경제체제가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었다. 일제가 만든 대지주와 소작 체제는 여전히 농민을 짓눌렀다. 때맞춰 식량난과 강제공출은 민심 불안을 재촉했다. 도시민은 살기 위해 식량을 찾았지만 농민들은 씨앗곡식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로 지주와 하곡 수집을 하는 경찰로부터 벼랑으로 내몰렸다.
군정의 식량난 대책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수준도 아니었다. 굶주림이 심각해지자 경상북도는 대구 주민에게 한 사람당 2홉씩의 식량을 배급하겠다고 했으나 공염불에 그쳤다. 이보다 앞서 경북 청송군에서는 200여 명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퍼졌다. 이에 미군정은 조선에서 먹을 것이 없어 겪는 가난은 흔한 일이라는 반응으로 어지러운 인심을 안정시키기는커녕 되레 들쑤시고 만다.
이렇듯 굶주림의 참상이 반 년 넘게 이어지자 대구신문편집자회와 기자단까지 나선다. 관리에게만 특별배급을 주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민중을 착취하던 버릇이 그대로 남은 것이라 질타한다. 배급을 실시할 자신과 능력이 없으면 퇴진하라며 경북 미군정의 책임을 묻는 성명을 낸다.
쌀 수급 등을 둘러싼 민심 이반과 민중들의 불만은 시간이 갈수록 겹겹이 쌓여 어느 순간 대구 10월의 폭풍과 만난다. 하곡 강제 공출과 일제의 묵은 옷을 그대로 걸친 경찰의 폭력성은 민중의 분노와 저항 앞에 맞닥뜨린다. 저항의 주역인 노동자와 농민으로 이뤄진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 상황에서 사건은 시작되고 이는 그 성격을 가늠케 해준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서 비롯돼 들불처럼 번진 10월 항쟁은 원인과 성격을 두고 당시에도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서울서 발행되는 한 신문은 그해 12월 3일자'10'1사건의 경북답사기'에서 군정 반대, 경찰 태도, 하곡 수집, 식량 문제 등을 원인으로 꼽았다. 가장 피해가 컸던 영천지역을 취재한 또 다른 기사는 강제적인 하곡 공출을 가장 큰 원인으로 들었다. 경상북도 지사 김의균은 10월 중순 기자회견에서 이 사태의 원인이 무리한 식량 공출에 있었다고 말했다.
총검거자 8천여 명 중 수형자 1천 명을 돌파하고 10월 사건이 일단락되었다는 기사는 이듬해 2월에 보인다. 사건의 파장이 크고 깊었다는 방증이다. 앞의 답사기를 이어보자. '동학란 이후 처음 보는 민요임에는 틀림없으니 사건의 정당한 비판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 그해 언론은 알고 있었고 그만큼 또 시간이 지났다.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대구 10월을 조사했지만 흩어진 구슬을 모으다 말았다. 정작 고르고 닦아 구슬을 꿰는 일이 남았다. 이태 뒤면 70주년이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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