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논단] 울진 대왕금강송의 품에 안기다

입력 2014-10-06 07:13:06

늙을수록 기품을 더하는 것은 나무밖에 없다. 우리가 감량할 수도 없는 시간인 수백 년의 세월을 늙는다고 표현할 수는 없다. 더해지는 그 기품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나도 나무가 되고 싶다. 8월 초 매일신문 계산논단 칼럼에 쓴 울진 소광리의 금강송 군락지에 있는 대왕금강송에 대한 독자들의 반향이 클수록 그 현장을 가보고 싶은 열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상의 질서를 휘둘러댈 만큼 대왕금강송 가슴앓이가 깊어졌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800년이 넘는 상상 속의 대왕금강송이 부르는 손짓에 전율이 스쳐가기도 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말 울진생태연구소 이규봉 소장을 찾아 산행을 채근했다. 그가 공들여 닦은 금강송 둘레길의 흔적을 따라 오르는 길은 맑은 물과 천연 숲이 어울린 감동으로 시작되었다. 옛날 보부상들이 그들의 안전과 행운을 빌며 세운 새재를 넘기 전의 서낭당인 '조령성황사'까지는 그랬다. 아직은 왕복 4시간 산행의 고통을 짐작하지도 못했다.

서낭당 위의 길이 대왕송을 찾아가는 길은 고단한 행군의 시작이었다.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동네 사람들이 송이를 따거나 약초를 캐러 드나드는 흔적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산철쭉 군락을 헤치며 신갈나무 녹음에 묻히다가 잠시 고개를 들면 곳곳에 하늘까지 쭉쭉 뻗은 금강송의 자태에 압도되면서 오르고 또 올라야 했다. 300년이 넘는 금강송에는 일일이 번호를 붙여놓았다. 바위틈을 얼싸안은 금강송의 기품도 여전하다. 몇백 년 세월의 더께를 가슴으로 안는다. 자연은 그렇게 사람들의 시간으로는 감량할 수 없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절반쯤 올라 이 소장이 '왕자금강송'이라 이름 붙인 400~500년쯤 된다는 거목 앞에서 빵 몇 조각으로 점심을 때운다. 부디 몇백 년 후에는 대왕송으로 거듭나기를 축원해 본다.

한 차례 산 능선을 헛돌기는 했지만 대왕금강송이 알현을 허락했다. 태고의 정적이 감도는 800m 안일왕산(安一王山)의 정상 가까이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황장목을 감싸고 있는 태고의 신비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큰절을 올렸다. 귀기(鬼氣)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800년이 넘는 대왕금강송이 세월의 철옹성 너머 권위의 빗장을 풀고 세속에 물든 나를 포근하게 품어준다고 편하게 생각했다. 자연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렇게 품위있고 아름다울 수 있는데 속세의 우리는 얼마나 왜소하고 왜소한가. 먼 훗날 또 다른 나그네가 나처럼 이 자리에서 무릎 꿇고 위안을 받을지도 모른다.

대왕금강송을 오랜 세월 지탱하고 있는 얽힌 뿌리에 가슴이 뭉클했다. 햇볕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에서 신갈나무 등 활엽수에 쫓겨 산등성이 주변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는 고통의 현장이다. 사람 허벅지 크기의 탄탄한 뿌리들이 얽혀 낭떠러지의 경사면을 극복하며 대왕송이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을 수 있도록 한다. 평형을 유지하며 처절한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살아남게 한 몸부림의 흔적이다. 잠깐 스치는 우리의 삶도 비뚤어진 세상에 우리를 똑바로 설 수 있도록 수많은 이런 뿌리들이 각자의 가슴속에 얽히고설켜 있는지도 모른다.

원시림을 헤쳐나가야 하는 산행이 고달파서인지, 시간의 문을 쉽게 열어주지 않아서인지 대왕금강송을 알현하는 길은 속세의 길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대왕금강송의 추정 수령도 꼭 집어 800년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 같다. 이런 환경조건을 이겨낸 세월이 천 년이라고 해도 그냥 동의할 수밖에 없다. 황장목의 신비를 사진에 담을 수는 없는 일이다. 태고의 음향과 바람과 그 기운은 바로 여기서 땀을 훔치며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또 천 년의 고독 속에 의연하게 이 자리를 지킬 대왕금강송을 두고 다시 속세로 하산해야 한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또다시 만나랴 싶지만, 불경스러운 바람이지만 나도 이 나무 밑에 묻히고 싶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의 소원을 빌어본다. 천세만세 강건하소서.

조상호 나남출판 회장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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