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네서 만난 '삶의 바다'…부산 초량 근대골목 '이바구길'

입력 2014-09-27 07:04:43

부산역 인근 피란민 동네 관광코스…일제강점기 건물 등 곳곳 근대유산

정겨운 동네 풍경. 초량동 주민들이 커피를 나눠 마시며
'168 도시락국'에서 판매하는 '추억의 도시락' 세트. 3천500원.
168계단. 산복도로에서 부산항까지 가장 빨리 내려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정겨운 동네 풍경. 초량동 주민들이 커피를 나눠 마시며 '이바구'를 나누고 있다.
김민부전망대에서 바라본 부산의 풍경. 부산항대교 위에 구름이 걸려 있다.
168계단. 산복도로에서 부산항까지 가장 빨리 내려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김민부전망대에서 바라본 부산의 풍경. 부산항대교 위에 구름이 걸려 있다.

이웃 도시 부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부산은 해운대와 광안리에만 볼거리가 있는 싱거운 바다 도시가 아니다. 해운대 주변 바닷가를 벗어나도 도심에 볼거리가 넘쳐난다. 발걸음을 골목으로 돌려보자. 부산도 대구처럼 부산의 근대 문화유산을 보존해 '원도심 근대역사 골목투어'를 만들었다. 그냥 지나치게 되는 평범한 건물도 이야기를 입히면 그 속에 담긴 역사가 보인다. 일제강점기의 설움과 피란민들의 애환이 느껴지는 부산 동구 초량동 '이바구길'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이바구 할매'가 가이드, 더 알찬 골목 투어

부산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일단 걸어야 한다. '이바구길을 걷다'(이하 이바구길)는 부산 동구청이 초량동 산복도로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해 조성한 관광 코스로 6'25전쟁 피란민들의 애환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바구(이야기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골목 골목마다 '이바구꺼리'가 많다. 부산 골목 투어의 장점은 '이야기 할배'할매'다. 도시의 변화를 직접 경험한 60세 이상 어르신들이 구수한 입담으로 골목에 얽힌 이야기를 전하는 가이드 역할을 한다. 이날 기자의 가이드는 강정분(66) 할머니가 맡았다.

이바구길은 초량 외국인서비스센터에서 출발해 옛 백제병원과 남선창고 터, 초량교회를 지나 168계단∼김민부전망대∼당산∼이바구공작소로 이어진다. 첫 코스는 옛 백제병원 건물이다. 백제병원은 1922년 김해 출신 의사인 최용해가 지은 최초의 근대식 개인종합병원이다. "여가 바다랑 가까워서 지반이 약했다 하대요. 여기 보이소. 화강암으로 주춧돌을 이만큼 쌓았지예?" 강 할머니가 허리춤을 가리켰다. 이 병원은 당시 부산 3대 병원 중 하나였고, 독일과 일본 출신 의료진을 고용해 환자들을 끌어모았다. 병원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괴소문 때문이었다. 행려 환자의 시체를 병원에 보관했다가 "돈 없는 환자가 가면 죽여서 옥상에 보관한다"는 루머가 퍼지면서 환자 발길이 끊겼고, 빚을 진 최용해는 일본으로 야반도주했다. 이후 병원은 중국 음식점에서 예식장으로 용도가 계속 변경됐고, 현재는 이 같은 역사를 보존한 근대 역사 문화 갤러리가 들어설 예정이다.

이 건물 옆에는 남선창고 터가 있다. 1900년 함경도에서 배로 물건을 싣고 와 보관했던 최초의 물류 창고로, 명태를 많이 보관해서 '명태고방'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냉장 기술이 없었던 때였지만 내부에 수로를 파 항상 온도를 서늘하게 유지했다. 원래 이름은 '북선창고'였으나 윗지방에 같은 이름의 창고가 생기자 '남선창고'로 이름을 바꿨다. 또 남선창고 조합원들은 이후 수익금으로 장학제도를 만들고, 야간 사립학교를 만들어 교육 사업도 후원했다. 이곳이 남선창고 '터'인 이유는 2009년 건물이 철거되고 담벼락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현재 터 왼쪽에는 대형마트가 들어서 영업 중이다.

이바구길에는 명문(?) 초등학교도 있다. 초량초등학교는 나훈아와 이경규, 음악감독 박칼린이 졸업한 곳이다. 학교 앞에 있는 간판도, 이름도 없는 정겨운 문방구를 보며 옛 추억을 느낄 수 있다.

◆삶의 굴곡이 담긴 168계단

초량초등학교를 지나면 초량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이 교회는 1893년 호주 선교사 애덤슨이 지었다.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순교했던 주기철 목사가 생활했던 교회로, 이후 신사참배반대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또 6'25전쟁 당시 부산 임시 수도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예배를 본 곳으로 유명하다.

이쯤에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걷기 편한 대구의 골목 투어를 생각했다면 각오해야 한다. 부산은 괜히 '부산'이 아니다. 초량교회에서부터 오르막이 이어져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턱 막힌다. 강 할머니는 "부산 골목 투어는 체력이 받쳐줘야 한다니까. 우리는 많이 걸어서 익숙하지만 2시간 동안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부산 사람들이 관절염에 마이 걸린다 아입니꺼"라며 농담을 건넸다.

이쯤에서 쉬어가도 된다. 주민 쉼터인 '이바구 정거장'에서 간단하게 국수를 먹어도 좋고, '168 도시락국'에서 한 끼 해결해도 괜찮다. 이곳은 60세 이상 어르신들이 어머니의 손맛으로 정성스레 밥을 차려내는 식당이다. '시락국밥'과 '추억의 도시락'은 3천500원.

배를 채웠으면 다시 걸어야 한다. 하이라이트는 '168계단'이다. 산복도로에서 부산항까지 가장 빨리 내려갈 수 있는 지름길로, 계단 수가 168개다.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눈앞이 아찔해진다. 이바구길은 주민 모두가 '가이드'다. 계단에서 강 할머니의 설명을 듣고 있는데 화초에 물을 주던 어르신(69) 한 분이 나와 이야기를 거들었다. 평생을 초량동에서 살며 마을의 변화를 목격한 산 증인이다. "이 계단이 생기기 전에 여기가 원래 산이었습니더. 호박도 심고, 거름 줄라고 똥통도 만들었지. 아들이랑 놀다가 똥통에 빠지면 모친한테 윽쑤로 혼났다 아입니꺼." 어르신의 이야기에 따르면 예전 168계단은 쉬는 곳이 없어 내려오다가 굴러 떨어지고, 다치고, 심지어 죽는 사람까지 있어 그 후 계단 간격이 넓은 '쉼표'를 몇 군데 만들었다고 한다.

◆부산항 경치에, 아픈 다리도 잊어

168계단 사이로 들어가면 김민부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등단한 천재 시인인 김민부를 그리며 만들었는데 그는 부산에서 '자갈치 아지매'라는 프로그램을 만든 라디오 PD로 더 유명하다. 이곳에 서서 경치를 보면 아픈 다리를 잠깐 잊게 된다. 부산역과 부산항대교는 물론 초록색 방수 페인트와 물탱크가 옥상 여기저기 솟아 있는 정겨운 모습이 함께 눈에 들어온다.

이 외에도 볼거리는 많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장기려 박사를 기리는 기념관도 있고, 산복도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이바구 공작소'도 있다. 이바구 공작소 1층 벽에는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이들이 남긴 글이 많이 보였다. 1957년 수정동에서 태어나 다른 도시에서 사는 사람도, 미국에서 몇십 년 만에 와 초량동을 둘러본 사람도, 모두 고향을 향한 진한 그리움을 글로 표현했다.

다리에 힘이 조금 더 남은 사람에게는 '유치환의 우체통'까지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부산 풍경은 김민부전망대에서 볼 때와 또 다른 맛이다. 이곳에서 엽서를 사서 1년 후 이날로 편지를 보내며 여행지에서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는 것도 좋겠다.

걷기 힘든 사람들은 '산복도로 버스 투어'를 택하면 된다. 내년 3월까지 운영되는 이 투어는 부산역에서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 오후 2시, 오후 7시(야간경관 코스) 하루 3차례 출발한다. 비용은 1인당 5천원. 예약은 부산마을 협동경제 플랫폼 홈페이지(http://www.woorimaeul.or.kr)로 신청하면 된다. 최대 탑승 인원은 한 번에 18명이다.

글 사진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정기 투어: 매주 토'일 오후 1~3시(2시간 정도 소요), 신청 인원 5명 미만이면 당일 투어 취소됨

수시 투어: 주중 수시 운영(단체 최소 10명 이상 신청 시 운영)

참가 방법: 전화나 홈페이지 온라인 사전 신청 후 참가. 비용은 무료. 부산시(tour.busan.go.kr), 부산관광공사(www.bto.or.kr) 온라인 신청 및 전화 신청(부산관광공사 마케팅단 051-780-2178)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