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스 산맥의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박노해 시인 일행은 죽음과 대면한다. 칠흑 같은 고원지대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이내 숨차오는 희박한 공기. 어둠의 공포와 추위와 탈진으로 널브러진 일행 저 멀리 희미한 등불 하나! 그들을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유일한 구원자, 그 한 사람!
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고비마다 홀연히 나타나 등불 하나 밝힌 박노해. 1984년, 강제와 억압과 굴종이 만연했던 군부독재 시기 은 한 줄기 빛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직전 1997년, 는 이후 전개된 구조조정과 승자독식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유일한 출구이자 미래였다.
그악스런 신자유주의 열풍이 휩쓸고 지나가는 광풍 한가운데 자본의 충직한 노예이자 완장 찬 하수인이 누천년 4대강 대자연에 콘크리트 쏟아 붓고, 노숙자가 거리에 차고 넘칠 무렵 가 출간된다. 2010년 일이다.
자본과 임노동의 화해할 수 없는 대립관계의 20대를 지나 (), 큰집에서 40고개 넘어서며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벗은 () 시인이 제3세계를 누비며 얻은 결정체가 다.
무심하고 무연하게 세월이 흘러가도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광기는 식을 줄 모른다. 대를 이은 권력자는 자본의 주구 노릇에 희색만면 하지만, 진도 '맹골수도'에는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열 사람 원혼이 떠돈다. 울돌목 영웅을 기리는 동상 앞에서 46일 단식한 유민 아빠를 모욕하는 새누리당 의원들과 그들의 듬직한 앞잡이 '일베충'들과 뉴라이트, 언론권력의 '기레기'들은 오늘도 어제처럼 세상을 유린한다.
딱 한 달 전 광화문 광장, 그 자리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환하게 빛났다. 지극히 높은 자리에 있되, 언제나 낮은 사람을 찾아다닌 인간 프란치스코. '세월호 대참사' 유가족을 위로하고, 위안부 할머니 손을 맞잡고, 제주도 강정마을과 밀양 송전탑 주민과 얼굴을 마주한 프란치스코. 나는 거기서 '그 한 사람'을 보았다.
"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인간과 인간의 격의 없는 유대관계에 있다!"는 말을 실감나게 재현했던 인간 프란치스코. 그는 권력의 최종지점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12억 인간의 정점에 있으면서도 억압받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이 땅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진 권력자의 살 냄새가 전해지는 듯했다.
고작 4~5년짜리 선출권력을 선무당 칼춤 추듯 휘둘러대는 천박하고 고약한 인간들의 모질고 사나우며 날선 칼질이 멈추지 않는 야만과 동토의 땅! 송파구에서 세 모녀가 자살해도, 경주에서 리조트가 무너져 열이나 되는 대학생이 죽어나가도, 군대에서 청년 병사가 참혹하게 맞아 죽어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황음무도한 나라! 목숨을 건 단식을 조롱하고 '세월호 유가족'을 유족충이라 모욕하는 인간 아닌 인간들의 행악질이 가시지 않는 백정과 종놈들의 천국!
그러하되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께로족 청년 같은 시퍼런 청춘이 거리를 활보하는 한,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시인은 목울대에 힘주어 노래한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빛은 어둠을, 선은 악을, 인간정신은 야만을, 희망은 패배와 절망을 이겨낼 것이라고 시인은 확신한다. 희망은 절망의 시대, 야만의 시대, 악의 시대에도 끝끝내 꺾이지 않는 최후의 한 사람이 있다면 충분하다고 시인은 기록한다. 최후의 그 한 사람은 최초의 그 한 사람이기에! 오늘도 나는 '그 한 사람'을 되우 기다리고 있다.
김규종 경북대 교수 노어노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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