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방정환이 사랑한 '어린이'는 '조선민족'

입력 2014-09-13 07:00:44

방정환
방정환

사람에게는 자신이 속한 세대를 연결하는 문화적 기억들이 있다. 그것은 노래일 수도, 헤어스타일일 수도, 드라마일 수도 있다. 매달 초순 어린이 잡지 '새소년'이나 '어깨동무' '소년중앙'을 사려고 학교 앞 문방구나 서점으로 뛰어간 기억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금 40, 50대일 것이다. 이런 그에게는 잡지와 연관한 또 하나의 기억이 분명히 있다. 잡지에 첨부된 '응모엽서'가 그것이다. 다양한 경품을 제공하는 '응모엽서'는 그 시기 어린 독자들의 사행심을 이용한 마케팅 방법이었다.

사행심 조장이라고 비난받아 마땅한 이 상업주의적 발상을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어린이 잡지에 최초로 도입한 사람은 소파 방정환(1899~1931)이다. 방정환은 '어린이날'을 제정한 사람으로 유명하지만,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사위라는 사실은 방정환을 이해하는 또 다른 코드가 된다. 능력은 있었으나 너무 가난해서 기회를 잡을 수 없었던 방정환에게 손병희와의 인연은 다양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 인연 덕분에 방정환은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청강생이 되어 아동 심리와 아동 예술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접할 수 있었고, 천도교에서 발행한 조선 최초의 종합잡지 '개벽'의 편집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인연을 기회로 바꿀 수 있는 탁월한 능력과 감각을 지니고 있던 방정환은 이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조선 최초의 어린이 잡지 '어린이'(1923. 3~1934. 7)를 발행하게 된다. '어린이'가 발행된 1920년대 조선 사회에서는 문학은 '도'(道)를 담아야 한다는 보수적 사고가 여전히 강하게 힘을 떨치고 있었다. 이런 사회적 풍토에서 방정환은 발칙하게도 '재미'와 '흥미'를 앞세우는 잡지를 발간하면서 누구라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통속적인 읽을거리 중심으로 내용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손목시계, 쌀 한 섬 등의 경품을 내걸어 독자의 구매욕을 부추겼다. 조선 최초의 상업주의적 전략을 썼던 것이다.

하지만, 수익성을 중시하는 듯한 이러한 상업주의적 마케팅 전략의 이면에는 '애처로운 조선민족'에 대한 방정환의 연민과 슬픔이 있었다. 방정환이 잡지 '어린이'의 독자로 설정한 것은 어린 소년, 소녀만이 아니었다. 스무 살, 서른 살이 되어도 배운 것이 없어서 지식은 여덟, 아홉 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던 대다수 조선민족이 그 대상이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문학도 잡지도 모두 소수의 엘리트들이 읽을 수 있는 것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이기적이고 편협한 조선사회에서 방정환은 '어린이'의 지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다수의 조선민족을 위한 잡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방정환은 경품을 내걸고, 한글로만 이루어진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내세워 조선의 나이 든 '어린이'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조선의 미래와 민족으로서의 의무를 가르쳤다. 그것은 조선의 지식인이자, 민족 종교인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사위였던 방정환이 당대 조선사회에 대해 지녀야 할 책무였다. 그러나 이 숭고한 문화적 기획의 결과를 지켜보기에는 안타깝게도 방정환의 삶이 너무나 짧았다. 1931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삶을 마감해버렸던 것이다.

정혜영 대구대 기초교육원 강사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