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질서 재편의 현장 우크라이나 내전지역을 가다] (1)키예프의 메이단 혁명 전사들

입력 2014-09-11 07:24:03

거대한 텐트도시 된 혁명의 광장…병영처럼 생활 곳곳서 군사훈련

키예프 시내 메이단 광장에 세워진 혁명 기념탑
키예프 시내 메이단 광장에 세워진 혁명 기념탑 '요르카'. 우크라이나 혁명은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 정부를 무너뜨린 민주화 시위이자 친유럽 성향의 포로센코 정부를 탄생시켰다.
쉰 여덟 살의 지원병 블라디미르와 젊은 동료가 훈련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쉰 여덟 살의 지원병 블라디미르와 젊은 동료가 훈련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내전은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최근 우크라이나 반군의 공격과 러시아군의 개입으로 다시 격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동부의 독립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정부와 서방세계는 이에 대한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처럼 서방세계와 러시아의 대리전적 성격을 띠면서 진행되고 있다. 러시아는 유라시아경제동맹(Eurasia Economic Union)을 출범시켰으나 가장 핵심 국가로 꼽는 우크라이나만 빠진 상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물리적 충돌을 벌이면서 사실상 푸틴이 꿈꾸는 구 소비에트의 재건은 벽에 부딪혔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축소 내지 차단하려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면서 전쟁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태세에 있다.

국제질서 재편의 의미를 담은 우크라이나 내전 지역 현장을 찾아본다.

7월 말, 이른 아침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 시를 출발한 비행기는 2시간 만에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공항에 도착했다. 버스 창을 통해서 본 키예프 시내는 내전 중에 있으면서도 마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듯 평화스러움 그 자체였다. 키예프 역사에도 총을 멘 군인들이 쫙 깔렸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평상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5년 전의 키예프 역이나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여독을 푼 이틀 뒤(7월 31일), 우크라이나혁명의 역사적 산실인 메이단 광장을 방문했다. 작년 11월 말부터 메이단 광장은 '텐트도시'로 변하면서 혁명의 산파역할을 한 곳으로 여전히 텐트로 뒤덮여 있었다. 메이단 광장의 상징적 구조물이 된 '요르카'에는 지난겨울 동안 투쟁하다 숨져간 혁명가들의 사진을 걸어놓은 기념탑이 오가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올해 1월 27일, 새해를 기념하려고 장식용 전등들을 달아놓던 철제구조물에 중년남성의 시신이 매달린 채 발견되면서 이곳은 순식간에 혁명의 상징으로 변했다. 시민들은 이곳을 지나면서 십자가 성호를 긋거나 기도나 묵념을 올리면서 잠시나마 숨져간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서 200명 이상의 시민과 노동자, 학생들이 지난겨울의 찬란했던 투쟁에서 숨져갔다.

메이단 광장을 뒤덮은 텐트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이곳에 텐트가 들어선 시점은 작년 11월 말부터였지만 본격적으로는 올해 1월 들어서면서부터다. 어떤 텐트는 아예 펜스까지 쳐놓아 마치 병영처럼 만들어놓았다. 낮은 펜스여서 펜스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엿볼 수 있었다. 한 텐트의 마당에서는 군복차림의 서너 명의 청년들이 열심히 군사훈련을 받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러시아군 및 우크라이나 반군과의 실전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훈련으로 무술을 연마하는 중이었다. 바로 건너편 텐트의 마당에서는 군복차림의 젊은이들이 차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모두 우크라이나 르비프시 인근의 서부지역 출신이라고 했다. 그중에서 병사 한 사람은 자신을 메이단 출신의 군인으로 지원해가서 싸우다 며칠 전 슬로비얀스크에서 며칠 휴가를 나왔다고 소개했다.(메이단 출신이란 메이단 광장에서 장기간 시위를 벌였던 시위대 출신을 뜻한다)

슬로비얀스크는 석 달 동안 반군의 치하에 있었으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도시로서, 현재 우크라이나정부군의 치하에 들어오면서 정상적으로 돌아온 상태다. 그는 두 주 동안 휴식을 취하다 다시 전선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우리 지원군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무기도 제대로 없는 형편없는 상태"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 때문에 "수많은 사상자가 지원군에서 나오고 있다"고도 했다.

나와 대화를 하는 사이에 갑자기 지나가던 노인 한 사람이 들어와서는 젊은이들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왜 전쟁터에 가서 싸울 생각은 않고 여기서 놀고 있느냐?" 그러자 나와 대화를 나눴던 지원군병사가 "며칠 전 전선에서 돌아왔습니다. 노는 게 아니라 지금 군사훈련을 위해 대기하는 중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맞받아쳤다. 큰 소리를 듣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인은 멋쩍은 얼굴을 지으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노인은 메이단 광장의 텐트에서 지내는 젊은이들을 모두 무위도식하는 룸펜들이나 노숙자로 간주하고 있었다. 지난 5월의 대통령선거를 통해 새로 구성된 포로셴코 정부에서 메이단의 텐트들을 제거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자 텐트에 거주하는 활동가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대부분 젊은이지만 간혹 나이가 들어 보이는 군인들도 눈에 띄었다.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군인이 내게 다가왔다. 자신의 이름은 '블라디미르'이며 나이는 만 58세라고 소개했다. 필자는 그에게 "아들 같은 젊은이들과 군대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이들과 같이 이미 메이단에서 싸우면서 함께 생활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별문제 없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메이단 혁명을 통해 변한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머리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변화의 모습은 나중에 보게 될 것이지만, 지금은 우크라이나사람들의 정신이 변한 게 가장 큰 수확"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혁명에 참가했던 대부분 젊은이도 현실적으로는 별로 변한 게 없다는 불만을 털어놓았다. 메이단의 투쟁현장에서 팔을 잃어버린 한 시위자는 지금까지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정부를 비난하면서 "3차 메이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메이단에서 캠프를 정리하지 않고 버티는 이유도 새 정부를 비판적으로 주시하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동부지역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많은 메이단의 전사들이 지원군의 일원으로 동부전선으로 떠났고, 남아있는 자들은 캠프를 지키면서 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8월 9일, 우크라이나 정부는 메이단 광장의 지도자들로부터 합의를 이끌어내 메이단의 캠프들을 모두 철거하는 행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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