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회사원 이무정(가명) 씨. 업무와 회식에 찌든 일상을 살고 있다. 중학교 3학년 딸과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두고 있는데, 아이들과 나누는 일상 대화는 고작 이런 수준이다. "숙제 다했냐?" "학교에선 별일 없었고?" "컴퓨터로 쓸데없는 거 보지 마라." "스마트폰 좀 작작 들여다봐라." 건네는 말이 이렇다 보니 돌아오는 답도 무성의하기 짝이 없다. 괜히 길게 말을 꺼내봐야 잔소리일 뿐이고, 건성으로 답하는 아이에게 쏘아붙여 봐야 싸움밖에 안된다.
◆"아빠도 웹툰 보세요?"
그러던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던 중 두 아이가 나누는 대화에 이무정 씨는 귀가 번쩍 뜨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티격태격하는 두 남매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대화에 몰두했다. 주제는 바로 웹툰, 즉 인터넷 만화였다. 무엇을 봤느냐부터 등장인물 분석에다 스토리 예측까지.
두 남매는 마치 수십 년 만에 만난 단짝 친구가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놓듯이 끊임없이 웹툰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무정 씨는 슬며시 "너희들 '신과 함께'도 봤냐?"고 물었다. 몇 초간의 침묵. 그러더니 대뜸 딸이 물었다. 그것도 조심스럽게. "아빠도 웹툰 보세요?"
아들이 거든다. "벌써 봤죠. 지금 유료화됐는데 그전에 연재할 때 다 봤어요." 요즘 즐겨본다는 웹툰 제목도 줄줄이 읊어댔다. 매주 챙겨보는 웹툰만 25편이란다. 이무정 씨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허구한 날 컴퓨터 앞에 앉아있구나.' 그러면서 왠지 즐거웠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소재가 생겼다는 게 기뻤다. 공감과 소통이 가능할 것 같았다.
세 식구는 모이면 웹툰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림체가 어떻고, 작가의 이전 작품이 어떻고, 다른 아이들의 평가가 어떻고 등등 끝이 없다. 해외 만화축제에 참가한 우리나라 웹툰 작가들이 사인 공세에 시달렸고, 최근 어떤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라는 뉴스는 딸이 꼬박꼬박 챙겨서 들려준다. 대화 끝에 아빠는 잔소리 삼아 한마디 덧붙인다. "그래도 너무 많이 보지는 마라." 아이들은 "하루 30분도 채 안 돼요"라며 한목소리로 답한다. 지켜보던 아내는 "이젠 세 식구가 한 통속이구먼. 나도 웹툰 안 보면 대화에 끼지 못하겠네"라며 웃는다.
◆당신만 모를 뿐 아이들은 다 본다!
어깨동무, 소년중앙을 거쳐 보물섬을 섭렵한 세대들에게 만화는 상상력의 보고이자 사회성을 키우는 자양분이었다. 부모님 몰래 이불 속에서 킥킥거리며 책장을 넘기던 만화책이 이제 인터넷,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왔다. 훨씬 다양한 소재와 화려한 효과를 갖추고.
'웹툰'(Webtoon)은 '웹'(web)과 '카툰'(cartoon'만화)을 합성한 말로 인터넷에서 연재하는 만화를 뜻한다. '스마트 시대, 최고의 디지털 콘텐츠'로 평가받는 웹툰은 2003년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2004년 네이버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10년간 네이버에 연재된 웹툰은 520편이며, 작품 전체의 연재 회차는 4만여 회, 지금까지 누적 조회 수는 290억 건 이상이다.
스마트폰용 웹툰 전문 애플리케이션도 등장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의 2014년 2분기 실적 발표에 따르면, 다음앱 순 방문자는 지난해 2분기보다 43%, 앱툰앱의 순 방문자는 47% 상승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2 만화산업백서'에 따르면 2009~11년 만화출판업 총매출액은 3.5% 증가한 데 비해 인터넷 만화콘텐츠 서비스 매출액은 연평균 10.1% 이상 늘고 있다.
◆스크린이나 TV 속에 파고든 웹툰
사실 알게 모르게 웹툰은 이미 문화콘텐츠로 깊숙이 자리 잡았다.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실제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도 다수다. 2010년 윤태호 작가의 웹툰 '이끼'가 영화로 만들어져 관객 340만 명을 동원했고, 2012년 강풀 작가의 '이웃사람'과 '26년'이 각각 240만 명, 290만 명을 모았다. 'Hun'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최종훈 작가 원작의 '은밀하게 위대하게'도 배우 김수현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700만 관객을 동원해 흥행에 성공했다.
이 밖에 윤태호 작가의 '미생'(바둑이 인생의 모든 것이었던 주인공 장그래가 프로입단에 실패한 뒤 냉혹한 직장생활을 겪으며 벌어지는 이야기), 하일권 작가의 '목욕의 신'(신의 손을 가진 남자 허세가 빚 독촉에 시달리다 금자탕에서 목욕관리사들을 만나면서 이 세계에 입문하는 내용), 주호민 작가의 '신과 함께'(저승편'이승편'신화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만화. 한국의 전통 신들과 주인공들의 관계를 통해 보는 세상 풍자) 등이 상영 및 제작을 앞두고 있다.
◆세계 만화사이트 1위는 한국 웹툰
웹툰은 새로운 한류 문화 콘텐츠로 주목하고 있다. 이미 한국 웹툰은 세계 각국에서 대환영을 받고 있다. 웹툰은 한국에서 개발된 창의적인 콘텐츠다. 빠른 인터넷 속도와 광범위한 스마트폰 보급 덕분에 가능해진 현상이다. 이렇게 등장한 웹툰은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나 콘텐츠 공유 사이트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안타깝게도 저작권이 지켜지지 않는 불법 사이트들이지만 세계 만화의 인기와 트렌드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만화공유 사이트인 '망가폭스'(mangafox)가 대표적이다. 이곳에는 세계 각국의 만화 1만여 종이 영어로 번역돼 올라온다. 1일 현재 망가폭스 인기만화 순위에서 1위는 한국 웹툰 '노블레스'(820여 년 만에 눈을 뜬 뱀파이어 주인공 '라이'가 새로운 세상에서 겪는 이야기)다. 이 밖에 '브레이커2' '소녀더와일즈' '더 게이머' '갓 오브 하이스쿨' '신의 탑' 등 25위권에 한국 웹툰이 6개나 올라와 있다. 지금까지 일본 망가 일색이던 것이 최근 바뀌었다.
전 세계 웹툰 잠재 독자는 10억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 때문에 네이버와 다음은 올해부터 본격 해외 진출에 나서고, 정부도 최근 '만화산업 육성 중장기 계획'(2014∼2018)을 발표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세계 웹툰시장 비중을 2017년 3조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본다.
(Tip) "검색창에 웹툰 쳐보세요 자녀들과 가까워집니다"
인터넷으로 웹툰을 보고 싶으면 검색창에 '웹툰'이라고 치면 된다. 스마트폰 앱을 다운받을 수도 있다. 검색만 할 줄 알면 누구나 볼 수 있다. 연재 중에는 무료다. 인기 웹툰은 연재가 끝나면 유료화한다. 유효화 전에 첫 회부터 끝까지 훑어보는 것을 '정주행'이라고 한다.
기왕이면 자녀들이 즐겨보는 웹툰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물론 즐겨보는 만화는 서로 다르다. 기성세대들이 한창 인기리에 연재 중인 '송곳'이나 '마음의 소리' 등에 열광한다면 아이들은 학원물, 판타지 등을 주로 즐긴다. 즐거움의 코드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차이 때문에 대화가 가능해진다. 서로 권할 수도 있고, 왜 즐기는 만화가 다른지도 이야기해볼 수 있다. 이번 추석 연휴에 아이들이 열광하는 웹툰 한 편쯤 '정주행'하는 것은 어떨까.
김수용 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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