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의 멘토] <9>고윤환 문경시장 퇴계 이황 선생

입력 2014-09-01 09:05:36

"벼슬은 나 아닌 남의 이익을 위한 자리" 중요한 결정땐 450년 전 가르침 곱씹어

지난 8월 20일 고윤환 문경시장이 안동에 있는 퇴계 선생 산소를 찾아 절을 올린 뒤 비문을 읽고 있다. 고도현 기자
지난 8월 20일 고윤환 문경시장이 안동에 있는 퇴계 선생 산소를 찾아 절을 올린 뒤 비문을 읽고 있다. 고도현 기자
퇴계 선생 산소에서 잡초를 뽑는 고 시장.
퇴계 선생 산소에서 잡초를 뽑는 고 시장.

고윤환(57) 문경시장은 정통 행정관료 출신의 2선 단체장이다. 고 시장의 선조는 개성 고씨 집성촌이 있는 문경 영순면 왕태가 고향이지만 태어난 곳은 예천 용문이다. 예천 유천면 화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를 따라 다시 문경으로 이사해 문경중학교와 문경종합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영남대 지역사회개발학과를 졸업하던 해인 1980년 제24회 행정고시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는 공직생활 30년 동안 행정안전부 지역발전정책국장과 지방행정국장,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 총리실, 인천광역시 교통국장, 부산광역시 행정부시장 등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행안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지방행정국장을 역대 최장수 역임했다.

그는 당시 지방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생산성지수' 개발과 함께 중앙과 지방의 상생 협력에 혼신의 힘을 다했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말한다.

또 전국 지방자치단체장 중 유일하게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도 '30년 정통 행정관료 출신 자치단체장' 경력과 능력이 크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위원 중 유일한 선출직이라 대통령에게 가감 없는 제안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발암물질이 포함된 농촌 슬레이트 지붕의 폐해를 설명하고 전국적인 농촌환경개선 정책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또 서민들의 연료비 부담을 줄이고 건설 경기 활성화를 위해 도시가스 보급 사업을 앞당겼다. 또 지방자치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제안과 자문 역할도 충실히 이행하는 등 지금도 중앙과 지방의 상생행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난했던 유복자 고윤환

그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고 시장이 26세의 늦은 나이로 군 복무 중이던 1984년 돌아가시는 등 비운을 겪기도 했다. 고 시장은 "어머니가 일찍 (우리)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시골에서 날 키웠다. 내복을 사달라고 졸랐더니 먼 산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이 지금도 뚜렷하고 어머니가 그립다"고 말했다.

부인 허은숙(53) 씨에 대해서는 "집사람은 지혜롭고 항상 아끼며 절약하는 생활이 몸에 배어 있어 내가 신세를 많이 지고 있다"며 "공직자들이 부인 실수로 구설에 많이 오르기도 하는데 난 안심이 된다"고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아직 미혼인 재연(29), 재범(27) 씨 등 2남이 있다. 이들은 모두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그는 30년 동안 일만 하지 않았다. 관료 생활 틈틈이 학업에도 열정을 쏟아 서울대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은 데 이어 인하대에서 행정학 박사까지 딴 공무원 사회에서 보기 드문 행정의 '달인'이다.

그래서 기자는 일과 공부 모두 최고 수준에 이른 그의 멘토가 누구일지 매우 궁금했다.

◆퇴계를 사랑하다

고 시장에게 내 인생의 멘토에 대한 취재를 설명하자 그는 적잖이 고민하는 모습이었고,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며칠 후인 8월 19일 시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기자는 "도대체 멘토가 누구시길래 그렇게 고민하셨습니까"라고 물으니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고 시장의 멘토는 이 세상 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의 멘토로 삼고 싶은 분이었다. 바로 이 시대 가장 존경받는 옛 선현 '퇴계 이황'이었다.

"저는 퇴계 선생이 나의 멘토가 된 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군대 입대 바로 전날인 1981년 9월 2일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떠난 곳이 바로 안동 도산서원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옮겨간 거죠. 그때는 선생을 멘토로 삼기 전인데도 말입니다."

고 시장은 1988년 인천시 계장으로 있을 때 도서관에 있는 퇴계집을 읽으면서 선생을 이미 정해진 운명처럼, 공직자의 길을 가는 데 '큰 스승'으로 삼았다. "퇴계 선생은 다른 시대에 사신 분이지만 운명처럼 저의 멘토가 되신 겁니다. 전 뭔가를 판단할 일이 있거나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이 오면 450년 전 퇴계 선생에게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계속할수록 그는 인생의 멘토를 넘어 아예 퇴계를 '사랑'하고 있었다. "퇴계는 32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 첫 벼슬이 외교문서를 다루는 관리였고, 43세에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수많은 높은 관직이 그에게 내려졌습니다."

그는 퇴계의 일생을 줄줄 꿰고 있었다. "선생이 세운 도산서원에는 그의 학문 정신을 하나라도 배우기 위해 문인들과 제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지만 그가 조정에서 관직을 맡고 있을 때는 도산서원이 텅 비었다고 합니다. 퇴계가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갈 것을 임금에게 고하자 임금이 그 이유를 물었는데 '무엇보다 소인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벼슬이라는 것은 내 일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자리'라고 가르쳤습니다."

남에게 이익을 미치지 못할 바엔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편이 낫다는 퇴계의 '물러나는 용기'에 감동했습니다.

퇴계는 140여 차례 임명과 79번의 사퇴라는 기록이 말해주듯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힘써 한국사상의 큰 줄기를 이룬 대학자가 됐다.

"나아감과 물러감의 의미는 공직의 길을 걸어온 저에게 너무나 와 닿았습니다. 퇴계는 오늘을 살아가는 공직자들의 진정한 롤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 시장은 아예 퇴계와 일심동체가 돼 있었다. 그의 너무나 진지하면서도 해박한 퇴계론은 살아온 삶과 앞으로의 삶을 기자에게 마치 확고하게 다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공직자의 롤모델, 퇴계

고 시장의 막힘 없는 퇴계학 열강은 다음날인 20일 오전 8시 안동도산서원과 퇴계선생 산소로 계속 이어졌다. 이날 고 시장은 도산서원을 방문해 근무자들을 격려하고 '퇴계 선생님의 위대한 정신과 사상을 흠모합니다'라고 방명록에 기재한 후 서원과 1㎞쯤 떨어진 퇴계 산소를 찾았다.

굵은 비가 내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 다음 봉분에 숨어 있던 잡초를 손수 뽑기도 하는 등 부모님 산소를 대하는 것 이상으로 정성을 다했다.

그는 퇴계 산소에서 장르를 바꿔 '최고의 행정가 퇴계'로 멘토론의 무대를 이어갔다. "선생이 풍기군수를 할 때 밭이 하나 있었는데 채소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밭을 짓밟고 다니기에 집안의 머슴이 못 다니게 하려고 둘레를 쳤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둘레를 걷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돌아가는 것이 더 불편하니 내가 농사를 덜 지으면 된다'고요."

고 시장은 다른 사람의 것에 대한 사심을 경계했던 선생의 청렴결백함이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요즘 어떤 권력자가 이렇게 합니까? 백성을 위하고 서민을 위하는 마음이 깊었던 것입니다. 퇴계 선생은 능력이 출중하면서도 청렴했고, 타인에게 항상 겸손했습니다. 우리나라 공직자들이 가장 본받아야 할 표상입니다." 고 시장은 힘주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특히 영남 유림인 퇴계는 성리학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른 호남 유림들과도 서로 존경하며 배움을 주고받은 화합의 큰 어른이라고도 소개했다. 또한 퇴계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올곧은 공직자상도 항상 자신의 가슴속에 간직해 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세도가인 김안로가 '같은 안동 출신이니 잘 보살펴 주겠다'며 선생을 불렀지만 퇴계는 '결코 백성과 국익에 유익하지 못한 일이다. 지연과 학연에 얽매일 수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당과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미워하고 배척부터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세태인데, 퇴계가 지금 살아계시다면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또한 국익에 우선 가치를 두라고 호통쳤을 겁니다. 또 행정 하는 공무원도 학문하는 사람과 마찬가지의 마음자세를 항상 견지하라 하실 것 같습니다."

◆문경 행정 한가운데에 퇴계가 있다

그는 "선생이 대학자로서의 명망이 워낙 높아 공직자의 롤모델이 될 만큼의 훌륭한 행정가라는 점이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저는 퇴계로부터 행정에 대한 가치를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효율 있는 행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됐습니다. 제가 앞으로 문경을 위해 뭘 할 것인가 날마다 생각하는 것도 퇴계 때문입니다. 퇴계는 문경시장인 저에게 끊임없는 자기 수양과 공부를 거쳐 옳다면 반드시 실천하라고 가르치고, 항상 기본과 원칙에 충실하라고 채근하고 있습니다."

실제 고 시장은 퇴계의 가르침을 문경의 행정에 고스란히 녹여내고 있다. 고 시장이 취임하면서 문경시민들에게 극도로 피로감을 줬던 10여 년에 걸친 지긋지긋한 지역 정치싸움이 종식됐다. 사심 없고 주민을 섬긴다는 원칙이 확고한 그에게는 지역의 어떤 세력과도 싸울 일이 없고 갈등도 생겨나지 않았다. 전시행정과 낭비는 그의 행정사전 목록에서 아예 사라졌다.

안정을 되찾은 문경을 이제는 '전국최고의 강소도시'로 만드는 데 열정을 쏟고 있다. 문경새재 노점상 철거, 친환경 문경새재 만들기, 수몰지 자연석 재활용, 쓰레기처리비용 줄이기 등은 작지만 저비용 고효율, 검소한 행정을 지향하는 고 시장의 퇴계 멘토론 영향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시 안팎으로부터 거창한(?) 행정을 하지 않아 '너무 소극적이다'라는 오해까지 받은 적 있는 고 시장이지만 지금은 '문경 최고의 살림꾼'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고 시장은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다. 단벌신사로 알려질 만큼 검소하다. 또 매우 소탈하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이 자장면이며, 지금도 자장면을 즐겨 찾는다고 한다.

"문경의 앞날에 공직자의 자세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위 공직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조직의 컬러가 바뀝니다." 고 시장이 왜 솔선수범하는지 엿볼 수 있다.

고 시장과의 인터뷰 시간이 길어질수록 문경의 미래가 밝아 보이는 이유는 뭘까. 고 시장이 행정 수장으로서 올바른 공직자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레 내려진다.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그는 손발을 걷어붙이고, 쏜살같이 민원 현장으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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