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딸깍발이

입력 2014-08-29 11:01:21

'명망이 높은 선비가 어두운 밤 젊은 과부와 정을 통하다 들켜서 도망을 가다가 분뇨구덩이에 빠졌는데 설상가상으로 앞에 호랑이가 잡아먹을 듯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를 조아린 채 갖은 변명과 아첨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선비의 위선과 비굴함에 입맛이 떨어진 호랑이는 한바탕 훈계를 한 후 가버리고, 이른 아침 들에 나온 농부가 그를 발견하고는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제야 고개를 든 선비는 근엄한 목소리로 자신의 언행을 경천애지(敬天愛地) 의식이라고 둘러댄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의 한문 단편소설인 '호질'(虎叱)은 당시 유학자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와 위선적인 삶을 풍자하고 있다. 학문을 했다는 선비의 표리부동과 정절 부인의 부정한 행실을 싸잡아 폭로한 이 소설은 조선후기 사회의 가식과 모순에 대한 일침과 비판에 다름 아니다.

"남산골 샌님은 궁핍한 집안살림에는 아랑곳없이 늘 의관을 가지런히 하고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으며 오로지 청렴과 지조를 생활신조로 삼고 살아가는 선비이다. 언제나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 까닭에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스러워 '딸깍발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실생활에는 도무지 재주가 없어 궁색한 차림에 바싹 야윈 얼굴을 하고 있을망정, 심중에는 '앙큼한 자존심'과 '꼬장꼬장한 고지식'이 똘똘 들어차 있다."

일제강점기 한글운동에 앞장섰던 국어학자 이희승의 '딸깍발이'는 이해타산적이고 염치없는 현대인의 삶을 꼬집은 교훈적 중수필이다. 어려운 현실에서도 의기와 지조를 지키면서 글 읽은 사람의 도리를 다했던 선비의 올곧은 정신을 '딸깍발이'에 비유한 것이다.

조무제 전 대법관이 부산법원 조정위원장직을 3개월 전 조용히 사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청빈한 행보가 다시금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10년 전 대법관직에서 물러날 때도 수십억 원을 제시한 법무법인의 초청을 거절하며 신선한 충격을 던졌던 사람이다. 대법관 시절 전세 보증금 2천만 원의 원룸에 거주했던 그는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며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해결하면서도 모교에 장학기금을 기부했다. '관피아'와 '전관예우' 같은 탐욕과 부정의 사슬이 횡행하는 이 탁류(濁流) 사회가 조무제 같은 '딸깍발이' 하나 가진 것이 자랑일까, 수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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