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칼을 찬 선비 이순신

입력 2014-08-14 11:20:42

사화(士禍)로 얼룩진 16세기 조선의 혼란과 위기를 사상으로 극복하려 했던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더불어 한국 정신사의 거목이다. 남명의 유학정신은 개방적이고 역동적이다. 혁명적인 성격마저도 지니고 있다. '백성은 물과 같아, 임금을 받들기도 하지만 그를 엎어버리기도 한다'는 민암부(民巖賦)의 대목은 현대의 민중적 지식인의 풍모까지 내비친다.

유학의 본령인 실천성을 강조했던 남명은 제자들에게 천문, 지리 등 실용학문에도 관심을 둘 것을 강조했다. 특히 병법과 군사학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임진왜란 때 그의 문하에서 곽재우, 정인홍, 김면, 조종도 등 숱한 의병장이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남명은 '칼을 찬 유학자'였다. 그래서 불의와의 타협은 없었다. 당대의 권력자인 문정왕후를 '일개의 과부'로 치부할 만큼 직설적인 상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서릿발 같은 칼날이 자신의 내면으로 향했을 때는 삼엄한 경(敬)이 되었다.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 즉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義)'라는 글귀는 그가 평소 차고 다니던 칼에 새긴 패검명(佩劒銘)이기도 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이렇게 밖으로는 세상의 변혁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안으로는 스스로 혁신에도 주목했던 것이다. 남명과 동시대를 살았던 퇴계 또한 정의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내면의 칼을 찼던 선비였다. 시대변화의 본질인 인간에 주목하며 신세대의 가슴에 '이'(理)라는 정신의 칼날을 심어주기 위해 여생을 바쳤다. 이른바 선비정신이다.

충무공 이순신도 '칼을 찬 선비'였다. 이순신은 용감무쌍한 무인의 모습보다는 지장(智將)이요 덕장(德將)에 가깝다. 선비의 풍모를 지닌 무장이었던 것이다. 여느 선비처럼 학문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것을 지극한 책무로 여겼던 인물이다. 우리 역사상 손꼽히는 위인인 충무공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내린 전지전능한 장군이 아니었다.

한 평범한 선비가 자신을 다스리고 직분에 충실하며 묵묵히 정도(正道)를 가다가, 뜻하지 않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웅적인 자취를 남겼다면, 너무 인간적인 표현일까. 당시 주류세력의 등용문이었던 문과도 아닌 무과에 겨우 급제하여 마흔이 넘도록 미관말직에 머물렀던 그가, 처세에 무관심하고 시류에 영합할 줄도 몰랐던 그가 임진왜란이라는 대전란을 만나지 않았다면 역사에 이름이나 남겼을까?

영화 '명량'이 개봉 12일 만에 관객 1천만 명을 돌파하는 신기록을 세우며 '이순신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시대가 영웅을 낳듯이, 시절이 명화를 만든 것인가. 세월호 침몰과 윤 일병 사건 등 격랑에 휩쓸린 한국사회와 리더십을 상실한 지도층의 부재가 '명량대첩'을 되살리고 '영웅 이순신'을 부활시킨 것이다.

오늘 충무공이 새삼 주목을 받는 배경을 두고 '이상적 리더십의 부재에 대한 반작용' '혼란한 시대를 바로잡아 줄 선 굵은 지도자에 대한 열망의 표출'이라는 풀이도 나온다. 그러나 12척의 배로 300척이 넘는 왜선과 싸워 이긴 해전사상 전무후무한 '명량대첩'의 결과는 '영웅 이순신'을 만들었지만, 그 과정에는 '선비 이순신'이 있었다. 충무공이 무장으로서 남긴 영웅적 자취 밑바탕에는 조선 성리학이 다듬어 놓은 올곧은 선비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장수 된 자의 의리는 충(忠)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명량' 관객을 전율시킨 이순신 장군의 이 사자후는 무장의 기상이기도 하지만, 민본주의에 바탕을 둔 조선 선비정신의 발로이기도 하다. 결전을 앞둔 장졸과 민초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헌신을 이끌어낸 배경이다.

400여 년 전 왜란의 폭풍만큼은 아니지만, 오늘 우리 한국사회는 위기이다. 자신의 영달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정쟁을 일삼고 부정을 획책하던 지식인과 지도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데, 그때처럼 선비정신을 갖춘 지도자 몇몇이나마 없는 게 현실이 아닌가. 배가 120척이 있은들 제2, 제3의 명량해전을 치를 요량이나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칼을 찬 선비 이순신'에 목말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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